노루목에서 달천나루까지 - 7

김희찬 | 기사입력 2024/06/20 [17:30]

노루목에서 달천나루까지 - 7

김희찬 | 입력 : 2024/06/20 [17:30]

 

▲ 1910년대 중반에 찍힌 약사전과 소나무와 삼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 충주신문

 

▲ 1912년에 찍힌 철불(국립중앙박물관) 도금되어 있어서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 충주신문

 

▲ 2024년 단호사 약사전  © 충주신문

 

▲ 2024년 단호사 철불  © 충주신문

 

▲ 단월 시내버스 정류장 뒤에 빈 낚시대를 드리운 소년 임경업 동상  © 충주신문

 

▲ 1900년에 조사한 <충주군양안>의 '약사(葯寺)' 기록  © 충주신문


단월역은 역으로써의 기본 기능 외에 충주의 대표적인 문학 공간이기도 하다. 정지상에서 시작된 단월역 제영시의 전통은 조선시대에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단월역에 들렀고, 그곳에 묵었던 이들이 남긴 것인데, 단월역을 소재로 시를 지은 이들을 찾아보면 그 수가 적지 않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성현(成俔, 1439~1504), 양희지(楊熙止, 1439~1504), 정희량(鄭希良, 1469~1502), 조세구(趙世求, 미상), 박상(朴祥, 1474~1530),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정사룡(鄭士龍, 1491~1570), 이황(李滉, 1501~1570), 박승임(朴承任, 1517~1586), 윤형로(尹衡老, 미상),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이안눌(李安訥, 1571~1637), 신후재(申厚載, 1636~1699), 조태억(趙泰億, 1675~1728), 정기안(鄭基安, 1695~1767), 신체인(申體仁, 1731~1812), 이희발(李羲發, 1769~1850), 윤자학(尹滋學, 1830~1893) 등의 시가 전한다. 열거한 인물들의 됨됨이는 물론 문명(文名) 또한 쟁쟁하다. 이처럼 많은 인사들이 시를 지은 공간은 정지상의 첫 시에서부터 확인된다.

 

정지상의 시에는 ‘작은 누정(小樓)’이 등장한다. 그 작은 누정의 이름은 ‘계월루(溪月樓)’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14, 충주목 역원조 단월역) 지금은 사라졌지만, 단월역 공간에 있었던 계월루는 무수한 이들이 올랐던 곳이고, 그곳에서 수많은 시가 창작되었을 것이다. 단월초등학교 운동장을 중심으로 있었던 단월역 관리 공간의 한켠에 있었겠지만, 단월역 공간이 파괴되면서 함께 사라졌다. 달천동행정복지센터를 짓고 헐고 다시 지으면서 마당 한쪽에 누정을 하나 짓고 이름을 계월루라고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 처마 밑에 단월역에 들렀던 이들이 지은 시를 시판(詩板)으로 만들어 걸었더라면 어땠을까? 거창하고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단월역을 기억하며 이야기할 수 있는 실마리는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물며, 단월역 공간에 달천동행정복지센터가 들어선 지금, 모르는 이들은 단월이 아닌 달천동으로 착각하기 쉽다.

 

<단월역에 제하다 [題短月驛]>

 

버드나무 가지 깊은 곳에 초록이 넘실넘실 / 柳絲深處綠溶溶

홀로 누운 높은 누각에 저녁 바람이 들어온다 / 獨臥高樓納晩風

내일 뽕나무 아래에 무슨 그리움이 있을까만 / 明日豈無桑下戀

꿈속의 혼은 물과 구름 가운데 길게 드리웠네. / 夢魂長在水雲中

                                            - 정희량, 『허암유집』 권2, 시

 

달천동행정복지센터 근처에는 ‘단호사(丹湖寺)’라는 절이 있다. 이 절집에 대한 기록은 20세기 초부터 확인된다. 1900년에 조사된 <충주군양안(忠州郡量案)> 13책 남변면(南邊面) 형권(亨卷)의 하자(河字) 조에 ‘약사(葯寺)’로 기록했다. 이후 일제강점기 초기에 충주 지역의 문화재를 조사한 기록이나 사진에는 약사전(藥師殿)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1934년을 기준연도로 정리된 『조선환여승람』의 불우조에 ‘약사전’으로 기록하고 군의 남쪽 10리인 단월촌에 있다고 하였다. 단호사로 부르는 절집에 대한 20세기 초기의 기록이다.

 

양안에 기록된 ‘약사(葯寺)’는 단월역 소유의 밭 한가운데에 있던 3칸 기와집으로, 면세 대상[頉]이었다. 그리고 1915년과 1921년에 찍힌 유리건판 사진에 약사 또는 약사전 안에 있었던 철불이 확인된다. 사진의 불상은 하얗게 도금이 되어 있어서 철불인지 모른 채 지내오다가 1968년에 철불로 밝혀졌다. 지금은 도금을 벗겨내 보존 처리를 하였고, 약사전이 아닌 새로 지은 대웅전에 옮겨져 있다. 이 철불은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대원사와 백운암에 있는 철조여래좌상과 함께 충주 지역에 전해오는 대표적인 철불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보물 제5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 철불을 단호사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봄부터 간간이 들려온 소식에 철불이 7억원인가에 매매되어 어디론가 떠날 운명이라고 한다. 이 절집은 단월역이 생긴 초기부터 존재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숭유억불정책에 의해 배척되었지만, 약사전 하나에 의지한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절집 부근에 5층석탑이 하나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 【충주】 충주군 충주읍 단월리에는 연대 불명의 옛날 5중답(五重塔)이 있어 이것이 동리 전체를 수호한다고 일반 동리 사람들은 귀중하게 보존해 왔었는데 지난 10월 초순 경부터 이 탑은 어디로인지 가버렸으므로 일반 동리 사람들은 필연 어떤 악도(惡徒)가 절취한 것이라 하여 즉시 충주서에 도난계(盜難屆)를 제기하였던 바 의외에도 단월리에 거주하는 심진갑(沈辰甲, 40)이란 자가 이것을 절취하여 『트럭』으로 경성까지 가져가서 황금정 5정목 길거리에서 씨명불상의 사람에게 일금 29원에 팔아먹은 사실이 탄로되어 목하 전기 심진갑은 충주서 이 사법주임의 손에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매일신보』 1935년 10월 18일자 ‘붓방아’)

 

신문 기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절집의 기능이 약화된 후 단월의 수호탑으로 위하던 것인데, 지금 그것을 기억하거나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곡역의 대사동(大寺洞)이나 안부역의 대사동처럼 큰 역마을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절집의 흔적이었을 텐데, 석탑이 사라진 지 90년이 된 지금, 또다시 단월의 철불도 어디론가 팔려갈 상황이다. 그래서 더욱 아쉽고 궁금하다.

 

단월역도 사라졌고, 계월루도 없어졌다. 단월역에 딸렸던 절집의 오층석탑도 사라졌다. 이제는 그 절집의 약사전에 들어앉았던 철불마저도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이 추세로라면 단월역이 있었던 현장에서는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 다만, 가장 늦게 단월역 부근에 자리한 충렬사 입구에 소년 임경업을 형상한 동상만이 무심한 세월을 낚시질하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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