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머물렀던 단월을 벗어난다. 건대 쪽으로 시원하게 뚫린 너른 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굽어 뻗은 농로 같은 옛길을 따라 걷는다. 굽어지는 그곳이 단월역의 끝자락이다. 거기를 지나면 앞길 어딘가에 그럴듯한 솔숲이 있을 것도 같지만, 중간에 소나무로 울을 친 무덤 외에는 솔숲 비슷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마을 이름은 ‘송림(松林)’인데 말이다.
송림 마을에 닿는 길은 여유롭다. 오른편으로 탄금대까지 이어지는 너른 들은 넉넉하다. 돌아보면 계족산이 동쪽을 막으며 충주의 윤곽을 그려내고 있다. 그런 넉넉함을 따라 걸어가 만나는 곳이 송림 마을이다.
송림 마을은 달천을 따라 길쭉하게 형성된 마을이다. 달천나루를 두고 몇 번 고민했던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을 지나며 마주하는 강가에 그럴 듯한 나무 한 그루가 섰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그곳에서 강 건너를 보면 나룻배 하나가 새삼 아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너편 용관동에 이어지는 길이 없기 때문에 달천나루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 비록 1914년에 측도된 지적원도에 국유 대지가 많은 마을이기는 하지만, 몇 번의 고민 끝에 달천나루가 아닌 것으로 결론지었다.
달천나루는 송림 마을에서 강을 따라 내려가 달천대교와 철교가 있는 그곳이다. 달천나루는 그 존재 사실이 이른 기록에서 확인되는 곳이다.
“…(전략)… 왕이 다시 이자성(李子晟) 등을 보내어 3군(三軍)을 거느리고 이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3군이 달천(達川)에 이르렀으나 물이 깊어 건너지 못하였으므로 다리를 만들고 있었는데 노군의 괴수 몇 명이 하천을 사이에 두고 고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이 일을 꾸민 우두머리를 베고 나가 항복하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자성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면 너희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라고 하였더니 적의 괴수 등이 다시 입성하여 일을 꾸민 우두머리인 승려 우본(牛本)을 베어 왔다. 관군이 이틀간 유둔(留屯)하자 노군으로 용맹하고 건장한 자들은 모두 도망쳐 숨었다. 관군은 입성하여 남은 무리를 사로잡아 모두 주살하고 노획한 재물과 우마는 가지고 와서 바쳤다. …(후략)….” (『고려사』 권103, 열전 권제16, 제신, 이자성.)
고려사의 이자성 열전에 기록된 한 대목이다. 사건이 일어난 때는 1232년이다. 1231년에 충주를 공격한 몽고군에 맞서 싸워 이긴 노군ㆍ잡류별초가 피난했다가 돌아온 양반별초와의 갈등 상황이 심각한 대립으로 번졌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양반별초는 강화도로 피난해 있던 고려 조정에 상황을 알렸고, 이에 고려 조정은 이자성에게 명하여 삼군을 이끌고 충주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자성이 이끌고 온 삼군이 달천에 이르러 물에 막혀 다리를 만들었다. 이틀간 다리를 놓는 사이에 충주 민은 두려워했고, 분열되었다. 다리를 놓아 충주에 입성한 이자성의 삼군은 남아있던 노군잡류별초를 찾아내 모두 죽였다. 약속 위반이다.
몽고군에 맞서 싸워서 승리한 공을 세운 충주의 노군잡류별초는 양반별초의 몽니에 의한 모함으로 반란의 무리가 되었다. 그 상황을 진압ㆍ토벌했던 이자성의 열전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1231년에 있었던 몽고군에 맞서 싸웠던 충주 상황이 덤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달천나루에 다리가 놓였던 사실도 처음 기록되었다.
이때 놓은 다리는 지금처럼 철근콘크리트가 아니었다. 나무를 주재료로 놓았던 다리였을 것이다. 나루를 이야기하는데, 다리를 놓는 것이 조금은 생뚱맞다. 하지만 나루로써의 기본 기능을 가졌던 것과 동시에 다리를 놓았던 이유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조선시대에 충주의 상황을 정리해 놓은 여러 편의 지지(地誌)에는 빠짐없이 달천(達川)을 기록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는 “달천(達川), 혹은 덕천(德川)이라 이름하고, 혹은 달천(㺚川)이라 이름하는데, 주 서쪽 8리에 있다. 근원이 보은현(報恩縣) 속리산(俗離山) 꼭대기에서 나와서 그 물이 세 갈래로 나뉘는데, 그 하나가 서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었다. 배가 있다.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라고 하였다. 배가 있으니 나루로 기능하였고,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고 하였다. 『여지도서』(1759년)에 다리 이름을 ‘독갑교(獨甲橋)’로 적고,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고 하였다.
독갑교는 곧 도깨비다리라는 의미이다. 멀쩡하던 다리가 큰물이 나면 쓸려 떠내려가 사라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일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떠내려가는 경우도 있지만 충주에서 이 다리를 관리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크고작은 다리가 많았다. 『호서읍지』(1870년)에 실린 ‘읍사례(邑事例)’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예방(禮房)의 업무 중에 ‘各面風憲 差紙成貼 五里程內 道路橋梁申飭’이라고 하여 각 면의 풍헌(風憲)은 5리 안쪽의 도로와 교량의 관리 책임이 부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道路橋梁 修治之意 每年七月 傳令申飭於各面風憲’이라고 하여 매년 7월에 도로와 교량을 보수하라는 명령을 각 면 풍헌에게 전달하였다. 구체적인 유지보수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매년 정기적으로 도로와 교량의 유지보수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중에 달천다리의 경우 읍대동색(邑大同色)의 임무로 기록되어 있다. ‘達川橋梁 卜戶米 除裁減 在米二十石三斗八升三合六勺 二利出給 該津洞住 使之修治橋梁(年各不同)’이라고 하여 쌀 20석 3두 8승 3홉 6작을 2리의 이자로 내어주고 해당 나루에 사는 주민들로 하여금 교량을 수선 보수하도록 했는데, 그 수량 즉 예산은 해마다 다르다고 하였다. 일반적인 보수만 할 경우에는 상관없지만, 다리가 쓸려내려가 없어질 경우 새로 놓아야 하므로 비용의 차이가 생겼음을 예상할 수 있다.
이처럼 송림 마을이 달천나루가 아니었음은 달천 사람들이 달천다리의 유지보수 책임을 맡았던 것에서 알 수 있다. 달천다리가 중요했던 이유는 조선시대의 충주와 세곡의 운반에서 이해하면 쉽다.
고려시대에는 금천창(金遷倉)이 설치되어 충주와 그 주변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모아 배로 실어냈다. 금천창이 있던 곳은 지금의 중앙탑면 창동 마을을 중심으로 한다. 조선시대가 되면서 영남 북부 8개 군현의 세곡도 충주로 모아 배로 실어보내도록 하였다. 그리고 1465년(세조 11년)에 금천창을 가흥으로 옮기는 조치가 있었다. 세곡 운반에 있어서 가흥창이 중심에 놓인 상황이었다.
금천창이든 가흥창이든 그곳까지 세곡을 실어나르는 일은 달구지를 주로 이용했다. 그리고 그 중간에 가장 큰 장애로 존재하던 곳이 달천나루였다. 그래서 거기에는 너른 강폭에도 불구하고 다리를 놓았다.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는 기록은 세곡 운반 시기와 맞닿아있다.
하늘재와 새재를 시작으로 달천나루까지 걸어온 여정을 돌이켜 보면, 조선시대 세곡 운반로의 한 지점에 닿게 된다. 역로(驛路)의 노선을 따라오는 길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금천창과 가흥창에 이르는 세곡을 운반하던 세곡로(稅穀路)를 따라온 과정이기도 하다. 그만큼 달천나루와 달천다리가 가졌던 위상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다.
지금에야 1928년에 충북선 철도가 충주까지 연장되면서 놓은 달천철교 외다리가 쌍다리로 바뀌었고, 나란히 달천대교 쌍다리가 놓였지만, 100년 전 상황을 상상해보면 전혀 다른 풍광이 그려질 것이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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