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천나루에서 갈마까지 - 1

김희찬 | 기사입력 2024/08/06 [13:58]

달천나루에서 갈마까지 - 1

김희찬 | 입력 : 2024/08/06 [13:58]

 

▲ 충주역 급수탑(봉방동)  © 충주신문

 

▲ 충주역 광경<사진 출처: 1929년 4월 12일자 부산일보>  © 충주신문

 

노루목에서 달천나루까지 꼬박 석 달을 지났더니, 여름의 한복판에 섰다. 달천나루에서 갈마까지로 제목을 정했지만, 달천나루가 사라졌으니 달천다리로 바꾸는 게 맞을게다. 달천나루에 기차가 지나며 다리를 놓던 때의 이야기부터 이어간다.

 

달천나루에 충북선 철교가 놓인 것은 1928년이다. 충북선은 일제강정기인 1920년 3월에 조치원↔청주 구간이 착공되어 1921년 11월 1일에 개통되었다. 이어 1923년 4월 28일에 청주↔청안 구간이 연장 개통되었다. 이후 1928년 12월 25일에 청안↔충주 구간이 개통되며 충주역(현 충주 시내버스 차고지, 문화동)까지 단선으로 왕복하였다. 그때의 흔적으로 봉방동에 급수탑이 남아 있어서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한다.

 

해방이 되고 6.25를 겪은 후인 1954년에 충주에 비료공장 건설이 확정되면서 충북선은 산업철도로 구상되며 선로 연장이 시작되었다. 우선 비료공장 건설 부지인 목행역까지 1956년 4월 11일에 연장 개통되며 비료공장 건설에 필요한 자재의 운반에 이용되였다. 동시에 제천 봉양역까지 공사를 계속하여 1958년 5월 15일에 충북선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짧은 단어 하나지만, 1928년에 달천에 철교가 놓일 때의 기억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2003년도에 근 1년간 매주 월요일에 시내 모다방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던 네 분 노인들의 자리에 낄 수 있었다. 당시 최고령이 1916년생이었고, 1919년생이 다음이고, 1923년생인 두 분이 막내였다.

 

다리 공사를 할 때에 많은 충주 사람들이 구경을 가곤 했다고 한다. 당시에 다릿발을 세우면서 기중기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처음 보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사람들은 ‘어처구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어처구니’에 대한 정확한 어원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엄청나게 큰 사물’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자동차를 구경하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기차가 다닐 철도를 놓으면서 철교 공사에 동원된 기중기가 ‘엄청나게 큰 사물’로 보였기에 그렇게 부르지 않았나 싶다.

 

수 천 년을 이 땅에 살아오며 그 시간만큼 이용되던 달천나루에 어처구니가 등장하며 다리를 놓고, 그 겨울에 기차가 처음 충주에 들어왔다. 흐릿한 흑백사진에 담긴 개통식날 모였던 충주 사람들의 수효가 대단하다.

 

달천과 달천나루에 얽힌 이야기는 이것만이 아니다. 조선시대에 지은 충주와 관련된 수많은 한시에 달천을 언급하거나 제목으로 삼은 것도 상당하다. 또한 서울을 오가던 이들의 기행문류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 중에 두 수만 인용해 본다.

 

① <이규(李珪)가 생선을 보내 준 데 사례하다 [謝李生珪遺魚]>

 

昔作中原客 옛날에 중원에 나그네로 왔더니

今謫中原居 지금은 중원으로 유배되어 왔도다

但飮達川水 그저 달천의 물을 마실 뿐이요

   * 기우자(騎牛子, 李行)가 물맛을 잘 감정하였는데, 달천(達川)의 물을 제일로 쳤다.

不食達川魚 달천의 물고기는 먹지 않았는데

李生舊識面 이생은 예전부터 잘 알던 사이라

憐我長餐蔬 늘 채소만 먹는 내가 가련했나 보다

蔬餐或不供 그나마 채소 반찬도 더러 떨어져

咄咄盤中虛 어처구니없게도 소반이 텅 비었지

日暮走小僕 날 저물 무렵 어린 종이 달려와

火急扣吾廬 화급히 내 집을 두드려 나가 보니

貫柳三十輩 버들가지에 꿴 서른 마리 물고기

頭尾皆相於 머리와 꼬리 모두 서로 이어졌더라

川水多深淵 시냇물 깊어 소(沼)를 이룬 곳이 많아

潛泳亦有餘 헤엄쳐 노닐 장소가 충분하건만

哀哉竟坐口 슬프다 결국 낚시에 입이 걸려서

(魚+戢)〃隨豫且 비늘 모아서 예저 따르고 말다니

雲雷咫尺頃 구름과 우레가 바로 지척 위인데

回首失吹噓 고개 돌리매 그만 취허를 잃었구나

非無君子心 군자의 마음이야 없는 게 아니지만

此腹乃負余 이 배가 그야말로 나를 저버리누나

更約待夜月 다시금 약속하노니 달밤이 오거든

把網沿前渠 그물 가지고 앞 시내 따라가 보자고

      - 이행, 『용재집』 권5, <적거록(謫居錄)>

 

② <달천행(達川行)>

 

長江浩浩深難測 가없이 넓은 장강은 깊이를 알기 어려우니

下有蛟龍之窟宅 아래엔 교룡의 굴이 있으리라

沙頭白月夜無輝 모래톱의 하얀 달은 밤인데 광채 없고

岸上垂楊春不碧 물가의 수양버들은 봄인데 푸르잖네

客子停驂問野人 나그네 곁마 세우고 시골 사람에게 물어보니

野人云是忠州津 시골 사람이 말하길 여기가 충주나루란다

昔有勁敵蹴疲士 예전에 억센 적에게 쫓겨 지친 사람

六七萬人同沉死 육칠만 명이 동시에 빠져 죽었다는데

骨塡原土不能高 땅바닥에 메운 뼈는 높이를 알 수 없고

血沸江波半成紫 강물 파도에 휩쓸린 피는 반쯤 자줏빛이 되었단다

至今殺氣屯如雲 지금까지 살기가 구름처럼 진을 쳐서

往往鬼哭天陰聞 이따금 귀신 곡소리 흐린 날엔 들린단다

陳陶靑坂亦凄切 진도(陳陶)의 청판도 처량하고 슬프지만

達川之行不忍說 달천 가는 길은 차마 말을 할 수 없구나

                           - 권극중, 『청하집』 권2, 칠언고시

 

①은 성종 8년(1477)에 서거정이 편찬한 『여지승람』을 보완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완성한 이행(李荇, 1478~1534)의 시이다. 1504년에 갑자사화로 인해 6개월 정도 충주에서 귀양살이 할 때에 쓴 것이다. ②는 권극중(權克中, 1585~1659)이 지은 것으로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에 충주를 찾았을 때 지은 것이다.

 

두 시의 내용을 보면 확연한 구별이 하나 보인다. 용재(慵齋) 이행은 달천 물맛을 평했던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전고(典故)로 끌어왔다. 그 달천에서 잡았다는 물고기를 반찬하라고 보내온 이규에게 감사하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귀양살이 중인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시상(詩想)을 전개시켰다. 반면에 권극중은 시의 절반을 ‘충주나루(忠州津)’를 확인하는 것으로 풀었다. 그러고는 곧장 신립의 탄금대 전투와 전장터로 전환하여 매몰찬 비판을 가하며 시상을 전개시켰다.

 

충주가 겪었던 큰 전쟁 중의 참상을 달천이 시대적 경계를 이루는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임진왜란의 참상을 빗대어 기록한 두 편의 <달천몽유록(達川夢遊錄)>이란 제목의 소설과도 비견된다. 달천은 탄금대와 함께 1592년 6월 7일의 참상을 환기시키는 충주의 한 지점, 또는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그 달천나루와 달천다리를 건너며 여덟 번째 이야기를 생각하며 걷는다.

 

▲ 탄금교에서 본 달천  © 충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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