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도천이 끝나며 달천과 만나는 지점에서 하검단리가 끝난다. 산자락을 따라 닦인 길 끝의 모롱이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세 갈래로 길이 갈린다. 강둑길과 중간에 새로 낸 찻길, 그리고 제일 안쪽의 옛길이다. 망설이지 않고 옛길을 따라 갈마 마을을 걷는다.
오른편의 달천을 따라 합수머리까지 이어진 길, 또한 왼편에는 산줄기가 합수머리까지 이어 흐른다. 그 첫머리와 끝자락에 마을이 자리했다. 산 아래에 자리했고, 그 앞으로 길이 났다. 그 길은 가흥창으로 세곡을 바치러 가던 달구지 행렬이 장관이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비닐하우스 단지가 형성되면서 마을 사람들만 이용하는 길이다.
홍수로 인해 물이 불어날 때 피해를 막기 위해 강둑을 높이면서, 그 둑이 길이 되었다. 한국교통대학교 후문과 연결하는 이면 통로로 길을 하나 더 닦아서 마을을 우회하게 했다. 그리고 충주의 외곽도로를 만들면서 마을 뒷산 허리를 지나는 4차로의 길이 하나 더 생겨서 갈마 마을은 온통 길에 포위된 것처럼 되었다. 또한 인근에 공군 비행장이 있어서 훈련을 마치고 착륙하는 전투기가 달천을 따라 진입하면서 하늘길도 갈마를 지난다.
지금은 탄금교가 놓여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일은 없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시절에 갈마 사람들이 뉴스의 중심에 올랐던 때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강을 건너던 중에 배가 뒤집히며 여러 명이 희생됐다는 내용이다. 또는 강물이 적을 때에는 GMC 트럭이 강을 횡단하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트럭을 얻어 타고 읍내로 가던 사람들은 얼만큼의 요금을 냈다고 한다. 처음에는 강을 건넌 후에 요금을 받았다고 하는데, 요금을 내지 않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늘면서 운전수도 요령이 생겼다고 한다. 강 중간에 차를 세우고는 거기에서 미리 요금을 받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다 지난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어떤 때는 낭만의 한 장면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강을 건너던 때의 이야기지만 갈마에 있었던 물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탄금교가 놓인 갈마 마을 끝에는 자랑비를 세웠다. 삼거리가 된 그곳은 마을의 끝이기도 하고 시작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시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신립장군이 내습하는 적과 싸울 때 그의 애마가 홀연 사라져 싸움이 끝난 뒤 합수나루터를 건너 말 한 마리가 이 마을에 들어왔다. 말은 어귀에 있는 옹달샘에서 물을 마시고 슬픈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마을에서 잡으려 쫓아갔으나 말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마을 사람들은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신 곳이라 갈마라고 칭하고 말이 죽은 자리를 진혈이라고 찾고 있으나 찾지 못하고 이런 혈은 갈마음수혈이라 하며 채소재배 단지로 오이 토마토 등 특용작물을 재배로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는 마을임을 후손에게 알리고자 여기에 자랑비를 세운다.”
갈마마을자랑비 뒷면에 새긴 글귀이다. 1994년 7월 16일에 세웠다는 자랑비에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1592년 6월 7일(음, 4월 28일) 저녁에 있었던 탄금대 전투와 관련된 이야기와 자랑비를 세울 당시에 갈마 마을의 자랑거리를 짧게 이야기하고 있다.
자랑비에 새긴 것처럼 갈마 마을은 비닐하우스를 이용해 농사를 짓고 있다. 논밭이 많지 않은 마을이지만, 비닐하우스를 이용해 다른 곳보다 많은 수입을 얻고 있는 마을이다. 여기 뿐만 아니라 달천 양쪽에는 비닐하우스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비율이 높다.
신립 장군의 애마가 갈마 마을 뒷산에서 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1592년 6월 7일(음, 4월 28일) 저녁 무렵에 달천 건너 탄금대 앞은 조선군과 왜군 간에 격전이 있었다. ‘탄금대 전투’로 불리는 그 전투는 조선의 운명을 갈라놓았고, 충주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
‘강 건너 불구경’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날 갈마 사람들은 강 건너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몸서리쳤을 것이며, 합수머리로 밀리어 물에 빠져 죽는 사람들을 보면서 발을 동동 굴렀을 것이다.
● 27일(廿七日, 조선력 28일, 양력 6월 7일), 맑음(晴) 새벽 4시쯤 문경을 출발해 아침 8시쯤 안보를 지나 정오쯤에 충주에 다달았다. 서울에서 온 장군이 수만 병력을 인솔하여 부의 북쪽 반리[5리]의 송산(松山, 탄금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군사들은 깃발을 들고 말을 몰아 송산의 진을 향하니 패하여 도망쳤다. 대주와 섭주의 병사가 북쪽으로 뒤쫓았다. 목을 벤 머리가 3천여 급이고 포로가 수백인이었다. 대장 신입석은 죽었다. 혹은 신립이라 쓴다. 먼저 오른 이는 대주였다. 이날 밤 태수는 성에서 5정 거리에 진을 쳤고, 나는 성안에 있다. (寅刻發聞慶 而辰刻過安保 午刻達忠州 自洛將軍來 而率數萬之兵 府之北半里計陳松山 官軍擧旌旗 馳馬向松山之陳敗走 對州攝州之兵逐北 刎首三千餘級 虜數百人 大將申立石死 或作申砬 先登者對州也 此夜 太守去城五町許而陣 余在城中)
전투가 끝난 그날 밤에 대마도의 묘심사(妙心寺)의 중이었던 천형(天荊)의 기록이다. 우리는 8천 고혼(八千孤魂)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현장에 있었던 왜군의 기록에는 3,000이라는 숫자와 수 백인이 표현됐다. 왜군이 거둔 수급(首級)과 그들이 사로잡은 포로에 대한 숫자다. 나머지 4,000이 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부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대부분은 배수진(背水陣)의 끝자락으로 밀려 달천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고, 그들 대부분은 그렇게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그 참혹하고 참혹한 광경을 갈마 사람들은 강 건너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 야이기를 신립 장군의 애마 이야기로 풀어 놓았고, ‘갈마(渴馬)’라는 마을 이름과 포개어 놓았다.
전투가 벌어졌던 탄금대 앞은 축구장, 테니스장, 야구장, 재활용센터 등의 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옛 기록에 그곳을 ‘고전장(古戰場)’이라고 불렀다. 갈마 마을에서 고전장을 건너다 보았고, 다시 고전장 쪽에서 갈마 마을을 건너다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의 비명도 참혹함도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날의 주검이 켜켜이 쌓여 흐름이 막혔던 합수머리. 시뻘겋게 핏물 들었던 합수머리. 거기에는 다리가 세 개 놓였고, 보조댐이 생기면서 ‘탄금호(彈琴湖)’라는 이름도 얻었다. 수 백년 전의 일이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픔이며 슬픔이지만, 지금 우리는 기억에 인색한 것은 아닐까? 달천과 남한강은 그 기억을 간직한 채 오늘도 흐르고 있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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