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랗게 익어가는 창동 탱자나무 앞에는 오층석탑과 약사여래입상이 있다. 원래 이 자리에 있던 것이 아니다. 나란히 세워 놓은 설명문을 보면, 약사여래입상은 1977년에, 오층석탑은 1978년에 ‘인근의 폐광 또는 절터에 있던 것’을 지금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으로 설명한다. 석탑은 지금 자리에서 북쪽 100m 지점(설명에는 ‘1978년 남쪽으로 100m 지점인 이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으로 안내함.)이 원위치라고 하고, 여래입상은 ‘근처의 폐광에서 발견되어 1977년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원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재 위치의 서쪽 언덕이 옛 절터이므로 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얼핏 보면 같은 곳에서 옮긴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서로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을 알 수 있다.
원위치는 다르더라도 석탑과 여래입상은 아담하게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오층이라고 하지만 그리 커 보이지 않는 석탑과 함께 그 절반쯤 되는 여래입상은 젖살이 올라 통통한 볼을 가진 어린이처럼 앙증맞다. 둘 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옮겨온 지 45년이 지났지만 본래 하나였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특히 오층석탑은 <천리충주>를 진행하면서 만났던 여러 석탑 중에 문경읍 갈평리 보건지소 마당에 있는 갈평리 오층석탑과 닮은꼴이어서 비교된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강쪽 음식점 옆에 눈에 띄는 나무가 한 그루 있다. 훤칠한 키에 지날 때마다 눈길을 사로잡는 나무인데, 회화나무이다. 1982년에 면나무로 지정될 때 추정 수령이 310년이었으니, 지금은 350년이 넘었다. 은행나무와 함께 대표적인 학자나무로 불리는 회화나무를 충주에서 보기가 쉽지 않다. 시립도서관에 젊은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있고, 소일 시내버스 정류장 옆에 있던 것은 2012년에 태풍 볼라벤의 피해로 생을 마쳤다. ‘귀신 쫓는 나무’로도 불리는 회화나무! 창동에 있는 회화나무는 충주에서 가장 그럴듯하다. 밑에서 올려다보니 나무껍질 틈에 버섯도 아닌 것이 빼곡히 뿌리내리고 있다.
청명주, 오층석탑, 약사여래입상, 회화나무에 탱자나무까지 마당 하나를 중심으로 한눈에 보이는 아기자기한 곳이다. 그곳을 나와 30m쯤 가면 오른쪽의 두 집 사이에 묵직한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장암 정호(鄭澔, 1648~1736)를 모신 곳이다.
이 사당은 본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다. 사당 앞에 세운 안내문을 보면, ‘영일 정씨 후손들에 의해 누암서원 건물 중 북청 향현사를 현재의 위치에 옮겨져 장암 정호의 사당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하여 본래 누암서원(樓巖書院)에 있던 건물 중의 하나이다. 서원철폐령이 내려지며 전국에 중복 배향된 서원의 대부분이 훼철되었다.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중심으로 민정중(閔鼎重, 1628~1692)과 권상하(權尙夏, 1641~1721), 그리고 정호를 배향해오던 누암서원도 훼철되었다. 그 과정에서 ‘북청 향현사’를 지금 위치로 옮겨 정호의 개인 사당으로 삼은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장암사(丈巖祠)라는 정호의 사당이 따로 있다.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에 있는 이 사당은 정호의 묘역 입구에 위치한다. 그곳에는 장암의 묘를 중심으로 위쪽에 정호의 할아버지인 정직(鄭溭, 1588~1677)의 묘가 있고, 아래에 정호의 아들인 정희하(鄭羲河, 1681~1747)의 묘가 있다. 그런데 그곳에는 정호의 아버지 묘가 없다.
정호의 아버지인 정경연(鄭慶演, 1605~1667)의 묘는 충주시 금가면 문산리에 있다. 정경연은 충주에 세거한 연일 정씨 집안의 입향조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사정을 기록한 비석이 노은 고개 아래인 수룡리에 있어서 증거가 되고 있다. 이러한 관계를 두고 한때 고민한 일이 있다.
정호의 호인 장암(丈巖)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연풍면 적석리 입석마을에는 반계정(攀桂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반계정을 지은 커다란 암반을 ‘장암’이라고 한다. 장암은 거기에서 유래된 호이다. 또한 반계정이 있는 그곳은 정호의 고조부인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이 생전에 찾았던 은거지였다고 한다. 그것을 실현한 이가 정호였다.
현장을 찾아보고 확인하며 연결해 보니 따로 존재하던 각각의 의미가 연결되며 아귀가 맞아갔다. 그것이 결국 누암서원으로 모아졌고, 누암서원이 훼철된 후 건물 중의 하나였던 향현사를 옮긴 창동의 정호 사당이 그러한 관계를 설명하는 실마리 중의 하나였다. 사당만 보아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 찾아온 충주 지역의 변화와 그 중심 인물 중의 하나였던 정호를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정호 사당 뒤는 그냥 언덕이었다. 그곳이 개발되어 택지로 조성되어 있다. 아직 집을 짓지 않았다. 거기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며 창동 마을의 변화를 생각해 보았다.
사당을 지나며 약간 오르막길이다. 그 길에서 만나는 고개를 ‘메주고개’라고 한다. 그 고개를 경계로 창동리와 누암리가 나뉜다. 고개를 넘으면 새로 닦은 자동차 전용도로와 연결되는 삼거리가 나오고, 옛길을 따라 내려가면 오른편 강가로 소일(召日) 마을이 있다. <천리충주>를 진행하면서 몇 번 지나친 마을이었다. 그런데 지난 여름에 자료를 준비하면서 그 마을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 찾았다.
1692년(숙종 18) 12월 3일자 <승정원일기>와 12월 4일자 <비변사등록>에는 ‘忠州樓岩船所’를 언급하고 있다.
“성을 지키는 기구로는 불랑기(佛狼機,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이 가져와 전투에 사용한 대포)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현재 산성에 비축된 것은 2백여 문(門) 뿐이어서 만약 급변이라도 있으면 매우 부족합니다. 그래서 50문을 더 만들려고 두석(豆錫, 놋쇠) 30근을 수어청에서 동래(東萊)에서 무역하여 현재 선산(善山)에 실어다 두었습니다. 선산(善山)에서 충주(忠州)의 누암(樓巖) 선소(船所)까지는 불과 3~4일의 길이나 운임을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입시한 대신들에게 하문하시고 편리한 대로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又所啓, 守城之具, 無過於佛狼機, 而卽今山城所儲, 只是二百餘門, 脫有緩急, 甚爲不足, 故將欲加造五十門, 豆錫三十斤, 自本廳貿得於東萊, 今方輸置於善山, 自善山至忠州樓岩船所, 亦不過三四日程, 而運價無以辦出, 下詢于入侍大臣, 從便處之, 何如?)
충주 누암 선소(船所)! 선소는 배를 만들고 수리하던 곳이다. 수운이 발달했었다는 충주 물길을 운항하던 배를 어디에서 건조하고, 수리했을까? 그래서 누암 선소는 다시금 상상력을 자극한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홈피에 게재돼 있는 모든 이미지를 무단도용, 사용이 발각되는 즉시 민형사상 책임을 받게 됩니다. ※ 외부 기고는 충주신문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기고문은 원작자의 취지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가급적 원문 그대로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