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찾은 ‘누암선소’는 어디였을까? 충주에서 배를 만들고 수리하던 곳이 그 곳 밖에 없었을까? 또 거기에 생계를 걸고 살던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 그 일에 종사하던 이들의 후예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그들이 만들었던 배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그들이 만든 배는 몇 척이나 될까? 그들이 만든 배의 크기는? 여러 상상을 하며 생각해 보았지만, 아지 못게라.
남아있는 배가 없고, 선대에서 그 일을 했다고 말하는 이가 없으니 그저 막연할 뿐이다. 그나마 『호서읍지(湖西邑誌)』(1871) 충주목지(忠州牧誌)의 부록 격으로 있는 <읍사례(邑事例)>를 읽다가 관에서 파악하고 있던 선소를 추가로 확인한 것이 고작이다.
(승발이 관장하는 업무 중에) 균역청에 납부하는 봄ㆍ가을의 선세(船稅)가 돈 16냥 6전 5푼으로 4월과 10월에 두 번 나누어 상납한다. 금천(金遷)과 산계(山溪) 두 나루의 선소는 세금을 바치는 지토선이 머무는 곳인데, 식년(子ㆍ卯ㆍ午ㆍ酉年)마다 성책하고 도안을 만들어 순영에 보고한다. ((承發掌) 均役廳納 春等船稅 錢十六兩 六戔 五分 四月 十月 分兩次上納, 金遷山溪兩津船所 住處收捧地土船 成冊式年 成都案修報巡營) (충주목 읍사례 승발장(承發掌) 중에서)
금천과 산계에 선소가 있다고 했다. 금천은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이 『택리지』에서 소개한 것처럼 금천창(金遷倉)을 중심으로 형성된 창동과 그 주변이고, 산계는 목계(牧溪)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에서 언급한 누암선소와 함께 금천선소, 산계선소 등 최소 세 곳의 선소가 충주에 있었다. 그 중에 한 곳을 소일 마을을 중심으로 있었을 누암선소로 추정한다.
소일 마을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전에 정태준(鄭泰俊, 1943~ ) 선생님이 ‘소 물 건너갔다’는 말이 소일 마을과 관련된 것이라며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1893년에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콜롬비아세계박람회(현, EXPO)에 조선 대표[大員]로 갔던 정경원(鄭敬源, 1851~1898)과 그 동생 정필원(鄭弼源, 1861~1903) 형제 사이에 있었다는 얘기인데, 동생 정필원은 강 건너 금가면에 많은 땅이 있었다고 한다. 강가 풀밭에서 소가 꼴을 뜯고 있을 때, 소일 마을에서 건너간 정경원 집의 하인들이 정필원 소유의 소를 끌고 다시 강을 건너면 큰댁에서 가져갔기에 하소연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소 물 건너갔다’는 말이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소일’을 ‘소 잃’로 생각하고 지난 시절의 우스갯소리로 들었는데, 선소가 있던 마을로 의미를 두게 되면서 다시 보게 된다. 소일 마을을 지나 누암(樓巖)으로 향한다.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누암서원(樓巖書院)이 앞에 보이는 동산 밑에 있었다고 한다. 십 수년 전에는 기와집 한 채가 폐가로 버려져 있었는데, 몇 년 전부터 터를 밀고 건축 자재 같은 것들이 쌓여가고 있다. 누암서원에 대해서는 간단한 연혁 정도의 자료가 정리되어 있다. 서원과 관련된 문서 같은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다 자세한 사항을 알지 못한다.
2004년에 충주MBC에서 제작ㆍ방영한 다큐멘터리 <독립운동가 류자명>에 작가로 참여할 때의 일이다. 류자명(柳子明, 1894~1985) 선생은 『한 혁명자의 회억록』이라는 자서전을 1984년에 써서 남겼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에 몇 번을 읽으며 입력까지 했던 자료인데, 첫 페이지부터 막혔던 일이 있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부터 큰아버지의 특별한 도움을 받아서 전심으로 한문을 배워서 4형제 중에서 오직 하나의 지식인(知識人)으로 된 것이다. 그래서 평양감사(平壤監司)인 정경원(鄭庚源)을 따라서 평안도청의 주임비서로 되어 3년 동안 일하다가 돌아왔다.”는 첫 페이지 세 번째 문단인데, 평양감사 정경원이 누구인지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 10년이 지난 2015년에 정경원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서 10년 묶은 수수께끼가 풀렸다.
류자명 선생은 ‘평양감사’로 기억하고 썼는데, 그것은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개편하면서 ‘평양부 관찰사’로 부임했던 정경원에 대한 것이었다. 그때 정경원은 충주에 있던 류자명 선생의 아버지 류종근(柳種根, 1856~1929)을 ‘주임비서’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런데, 시골 충주에 살던 류종근과 어떤 인연, 관계에서 그를 발탁했는지 궁금했다. 그 과정에서 얻은 『문화류씨소윤공파보』와 『영일정씨문청공파세보』를 통해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되었고, 그 배경에 누암서원에서 동문수학했던 상황이 이해되었다.
누암서원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던 때에 정경원과 류종근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곳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두 집안의 족보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동문수학했던 인연을 계기로 여러 집안이 혼맥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관계 속에서 다시 1919년을 주목하게 되었다.
1919년에 ‘3. 1운동’이 일어났고, 그것을 계기로 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생겼다. 그 중의 한 단체가 1919년 4월에 조직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다. 단원 중에 이병철(李秉澈), 정낙윤(鄭樂倫), 류흥환(柳興煥), 류흥식(柳興植, 류자명 선생의 본명), 정태희(鄭泰熙), 윤우영(尹宇榮) 등이 충주 출신이고, 연병호(延秉昊), 김태규(金泰珪)가 괴산 출신으로 확인된다. 충주 사람들의 관계를 추적해보니, 선대가 누암서원에서 동문수학했던 관계였다. 그런 관계의 중심이 된 집안이 영일정씨 집안이었고, 중심 공간이 누암서원이었다.
누암서원은 사라졌지만 문 닫기 직전에 그곳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혼맥 관계를 형성했고, 그 자손들이 1919년 상황에서 똘똘 뭉쳤던 것을 보면, 누암서원의 기능을 다시 봐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2019년에 한국의 서원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지만 충북에는 한 곳도 없다. 지정된 서원의 경우 배향된 인물과 건축물의 역사성 가치 등이 두루 인정된다. 이름만 남은 누암서원의 경우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는 조건이 하나도 없다. 그 터마저도 잃어버렸지만 우리 지역에서 했던 순기능과 그곳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의 관계망을 추적하여 역사적 의의를 밝혀내는 게 필요하다.
파괴되고 변형된 누암서원 자리를 보는 게 서글프지만, 그곳이 누암서원이 있었던 자리라는 표시나 안내가 없는 건 더 서운하다. 쓴소리 하기는 싫지만, 걷다 보면 보게 되고 그럴 때마다 느끼는 문화행정의 요란한 구호는 여전히 딴 나라 이야기로 들린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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