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좌 의병의 활동의 핵심은 충주성 점령이었다

이규홍 대표이사 | 기사입력 2016/08/27 [14:48]

호좌 의병의 활동의 핵심은 충주성 점령이었다

이규홍 대표이사 | 입력 : 2016/08/27 [14:48]
8월은 광복절이 있는 달이다. 광복절을 맞아 우리는 광복의 기쁨을 나누기 이전에 우리민족에게 치욕을 안겨 주었던 일제 36년간의 암흑기를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충주가 조선시대에 까지도 인구가 전국 4번째로 많은 도시였다. 그러나 일제의 만행은 국모 시해라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고 당시 우리 민족이 죽기보다 꺼려했던 단발령을 실시 강제로 머리를 깎는 등 조선을 자기들 마음대로 하려한데서 울분을 금치 못하였던 것이다.

제천에서 일어난 을미의병이 충주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 운동을 펼친데 대해서도 일본의 무도함을 응징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 진위를 살펴보자. <편집자 주>


◊ 관찰사가 있던 충주

충주는 충청도의 수부도시로서 삼국시대에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전략적 요충지로 또한 철이 많이 생산되었던 고장으로 자원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삼국 중 가장 강력했던 왕이 지배하게 되었고 충주를 지배했던 나라는 충주의 중요성을 인식해 충주를 제2의 수도로 만들었던 것이다.

고려 때에는 8목 중의 하나였고 조선 때는 충청도 수부도시로 감영이 충주에 있다가 때로는 공주로 옮기는 것을 거듭했으나 1896년 조선을 13도로 개정할 때 충청북도의 관찰부가 설치되고 관찰사가 주둔하였던 곳이다. 또한 충주는 중부권 20개 군 즉 충주, 음성, 연풍, 괴산, 제천, 청풍, 영춘, 단양, 진천, 청안, 여주, 용인, 죽산, 음죽, 이천, 양지, 원주, 정선, 평창, 영월을 관할하던 곳 이었다.
 

◊ 을미의병의 충주성 공략

제천 자양영당 의병에 뜻을 굳힌 의암 유인석 선생은 제천에서 상황이 여의치 않자 영월에서 유학자들과 뜻을 모아 복수 보형의 큰 깃발을 세우고 호좌의병을 출범시킨다. 복수 보형이란 명성황후를 죽인 일본에 복수한다는 뜻과 보형 즉 단발령으로 인해머리를 깎이고 조선인의 의복을 강제로 양복으로 입히려한 것에 대해 다시 원형으로 돌린다는 뜻이다.

또한 호좌의 진은 충청도 좌측 즉 충북 북부지역을 상징하는 말이다. 1896년 2월 7일 호좌의진을 출범시키고 첩자들을 제거한 뒤 편제를 개편한 호좌의병은 2월10일 영월을 떠나 2월11일 제천군을 무혈 접수하고 격고팔도 열읍 이라는 격문의 띄워 전 국민에게 궐기와 항전을 할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이들의 사기가 더욱 높아지고 명분이 생긴 것은 고종의 애통조서가 민영기를 통해 전해져 비분과 통탄이 골수에 사무쳐 토역복수의 결의를 더욱 굳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수가 화서 이항로 선생의 학파로 구성된 의병들은 말 피를 입에 바르고 함께 맹세하고 의지를 굳건히 함과 동시에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군수 서상기를 처단하고 그들의 목표였던 충주성 공략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충주선비들이 나서줄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충주의 공략에 대한 목표인 이곳 충주는 개화당 정권이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가던 곳으로 정치적 의미가 크다는 것과 서울로 진출할 수 있는 거점이 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부산에서 서울을 잇는 일본군의 통신선을 차단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의 관찰사 김규식은 단발령을 강력히 추진하여 자신의 관할구역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던 터라 의병의 공격 목표가 된 것이다. 당시 충주성에는 경병 400명, 일본군 200명, 지방대 500명 등 1000여명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호좌의병군은 제천을 출발할 때 4000명의 부대를 이끌었으나 중추원 의관과 관찰사 등을 역임한 김세기와 이조판서 궁내부대신 등을 역임한 심상훈이 을미사변에 분개해 고향 원주로 낙향하여 격문을 통해 모집한 의병이 강원의병과 합세하여 유인석 부대로 합류하고 우기정이 제천일대에서 민병 3000명을 모집하고, 이원하가 평장에서 동원한 민병 수천 명 그리고 이호승이 거느린 민병 500명 등이 합류 민병대는 일만 정도로 늘어났다. 그러나 무기를 소지한 의병은 불과 몇 백에 지나지 않아 충주성을 지키고 있던 관군와 일본군 등에 비해 군세는 열세였다.
 

◊ 충주성 공략 성공은 민심의 이반이었다

유인석 의병은 군세의 열세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으로 충주성 내에 있는 협력자들과 내통하여 충주성을 공략하였다. 충주 관찰사 김규식은 단발령과 복식문제 등에 적극적이어서 머리 깎는 것을 목숨보다 싫어했던 당시 충주 주민들에게 크게 반발을 샀던 것이다.

김규식은 일본과 가까운 친일론자 박영효의 직계로 단발령을 철저히 준수하려 했다가 반발을 샀던 것이다. 유인석 의병은 북창 나루를 건너 주력부대를 이끌고 북쪽에서 충주성을 공략하였고 동남쪽에서는 신지수 등이 이끄는 별동대가 공격을 감행했다. 김규식과 참서관 등은 관병을 동원하고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도움을 받아 대항하였으나 의병들의 기습과 대규모 공세에 당황하였다. 이들은 가흥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일본군이 여주, 이천 등지에서 여주의병장 심상희 부대와 접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주를 지원 할 수 가 없었다.

또한 의병들이 달천쪽의 나루를 끊어버렸기 때문에 가흥병참의 도움을 빨리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의병진의 포수 서장석과 엄팔용이 미리 성내에 잠입 인척인 친위대 장교와 내통하여 지방군이 성문을 미리 열어 놓고 달아났기 때문에 성안에 있던 일본군과 관군은 결국 성안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김규식 또한 성의 옆문으로 도망쳐 호암 촌에 머무르다 집주인의 고발로 2월19일 오명춘에 의해 잡혀와 처형당했다.
 

◊ 충주성 탈환과 수성

충주성을 공략한 호좌의 진은 각 처에서 모인 의병이었다.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원주의 김세기, 심상훈과 이원하 부대, 강원도 춘천의 이소응부대, 경북 등에서 모여 충주성을 공략한 것이다.

그 만큼 충주성은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우리나라의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호좌의 진이 충주성에 입성하자 장진 부사 이문흠이 단양 민병 130명을 모집해 합세했고 장기 전현감 신태홍이 호서지역 군사 수백명을 모집하여 호좌의진을 도왔다.

또한 2월 17일 춘천의병장 이소응이 합류하는 등 세는 더욱 불려졌다. 충주성을 빼앗긴 일본군과 관군은 그들의 병참기지인 수안보와 가흥에서 병력을 충원받고 충주 탈환작전에 돌입했으나 의병들의 강력한 방어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월23일 가흥쪽 일본군이 쳐들어와 이를 막고자 했던 이춘영이 이를 몰아내고 돌아오는 길목에서 이들의 병참기지인 수안보를 공격하다 전사했다. 이춘영은 충주성 공격시 선봉장 김백선과 함께 제일 앞장서 용감히 싸웠던 사람이다. 그러던 중 일본군이 증원되어 의병들에게는 물자와 무기 등이 턱없이 부족해 고난을 겪기 시작했다.

더욱이 날씨가 추워지자 충주로 향하는 길목 요소를 지키던 의병들이 성내로 철수하게 된다, 또한 들어오는 적을 막다 주용규가 전사한데다 연일 계속되는 전투에서 피난가는 사람이 많아지고 일본군의 증강과 만리산 등 높은 곳에서 총을 쏘는 일본군을 막아내는데 힘에 겨웠다. 이러한 어려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유인석은 명문가 이주승을 조정에 보내 고종에게 탄원서를 올리고 관군이 합세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그때 조정에서는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상태이고 단발령도 해제되어서 명분이 그 만큼 약화된 상태라 이는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유인석 의병부대는 날로 증가되는 일본군과 관군의 병력과 군세에 눌려 다수의 희생자를 낸체 충주성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지평에 가 있던 김박선이 포군 100명을 인솔하고 와 의병의 사기는 크게 올랐다. 그러나 밀려오는 일본군을 겨우 물리쳤으나 총으로 무장한 그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급기야 3월5일 동문을 빠져나와 충주성을 버리고 제천으로 철수하기에 이른다.
 

◊ 충주성의 중요성과 충주의병

충주성은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20개 고을을 관할하는 큰 성으로서 경기, 강원, 충청을 아우르는 그 영향력이 지대하였다. 호좌의병이 제천에서 일어나 영월에서 창의하였지만 그들의 목표와 활동무대는 충주였다.

이때 충주에서도 이기진, 백남규, 정화용, 정시창 등 많은 의병들이 가담하여 충주성 공략에 많은 공을 세우게 된다. 또한 충주성을 경기, 강원, 충청, 경북 등의 연합군으로 공략했어야 할 만큼 가치가 충분한곳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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