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충주의 도로교통과 도시 발달

전홍식 교통대학교 한국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 기사입력 2016/08/30 [13:10]

조선시대 충주의 도로교통과 도시 발달

전홍식 교통대학교 한국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 입력 : 2016/08/30 [13:10]

교통의 발달은 사회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교통의 발달이 도시를 만들었는가, 아니면 도시가 교통을 발전시켰는가 하는 양자의 상호관계는 우선 순위를 정할 수 없고 서로 순환적이고 보완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조선건국 후 한양천도를 계기로 조선정부는 한양을 중심으로 고려시대의 도로체계를 답습하여 중앙과 지방도시를 연결하는 간선도로망을 발전시켰다. 한양에서 의주를 종착지로 서북으로 뻗은 도로를 ‘서로’라 하였고, 함경도 서수를 종점으로 하는 도로를 ‘북로’라 하였다. 충청도 서쪽을 지나 전라도로 연결하는 길은 ‘산남로’라고 하였으며, 한양에서 충청도 동북부 지방을 거쳐 경상도의 동래까지 뻗은 도로를 ‘동래로’라 하였다. 대륙의 문화와 문물이 들어오는 ‘서로’와 일본에 문화를 전파하는 통로인 ‘동래로’는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으므로 중요시되었다. 조선시대 충주는 한양과 동래를 연결하는 동래로 상의 중심도시였다.
임진왜란으로 동래로는 왜구의 침략로가 되었고 충주는 왜군과의 항쟁으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충주에 있던 충청도 감영도 1602년에 공주로 이전하였다. 조선후기 들어 상업이 발달하면서 교통의 요지로서 물산이 집산되는 곳에 도시가 발달하였다. 조선후기 기록들에서는 도시적인 면모를 갖춘 지역을 ‘도회(都會)’로, 보다 규모가 큰 지역을 ‘대도회(大都會)’로 표현하였으며 전국적으로 도시가 성장하고 있었다. 충청도에서는 단연 충주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충주는 육로교통과 남한강 수운을 연결한 중심도시로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도시발달을 촉진하였다.
1770년에 도로고(道路考)를 편찬한 신경준(申景濬)은 한양을 중심으로 6대로를 설정하였다. 제1로는 서울~의주간 5561리(里), 제2로는 한양~경흥간 4217리, 제3로는 한양~평해 1875리, 제4로는 한양~동래간 3720리, 제5로는 한양~제주간 1430리, 제6로는 한양~강화간 230리였다. 18세기에 6대로였던 전국의 간선도로망은 상품유통경제의 발달로 10대로까지 확장되었다.
이와 같은 간선도로 중 충주와 관련이 있는 도로는 앞에서 살펴본 한양~동래간의 동래로와 한양~봉화간의 봉화로이다. 동래로는 서울-한강-신원점-판교점-용인-김령장-좌찬역-석원-달천-단월역-수회-안보-조령-문경-유곡역-낙동강-금호강-대구-팔조령-청도-밀양-양산-동래-부산진까지 연결되었다. 동래로는 충주읍치와 일정거리가 떨어진 달천과 단월을 통과하여 조령을 넘어갔고 달천에서 충주읍성의 북문으로 연결되었다.
봉화로는 서울-송파-광주-이천-가흥창-목계-충주-황강-단양-죽령-풍기-영주-봉화-태백산사고까지 연결되었다. 봉화로는 목계와 북창진을 거쳐 읍내로 진입하였고 충주읍성의 동문을 거쳐 안림리를 통해 신당, 황강으로 연결되었다.
조선후기 충주는 동래로와 봉화로가 연결되어 결결성이 뛰어났고 한양으로의 접근성 또한 좋았다. 조선전기까지의 도로가 역로, 조운로, 사신로 등 공로(公路)로서의 성격이 강했다면 조선후기 도로는 지역 간의 교역과 상업기능이 중요시되었다. 충주는 경기도의 광주, 이천, 장호원과 단양, 풍기, 영주, 봉화 등 지역의 중심장(中心場)을 연결하는 상업로의 성격이 강한 봉화로가 형성되고 발전하는 거점역할을 하였다. 또한 동래로와 봉화로 상의 최고도시이며 남과 북을 연결하는 육로교통의 요충지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였다.
종교, 학문, 새로운 기술 등이 충주를 거쳐 경상도 지역으로 전파되고 경상도의 우수한 농법이 조령을 넘어 충주를 통해 각지로 퍼져나가는 선진문물이 유입되고 전파되는 거점역할을 하였으며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교통로를 따라 생활권과 시장권이 형성되고 충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 간의 다양한 교류를 통해 동질의 문화권이 형성되고 발전하는 문화교류의 통로역할을 하였다. 충주를 중심으로 직산, 장호원, 음성, 괴산, 제천, 단양, 청풍, 영춘, 영월, 평창 등의 지역이 하나의 권역을 형성하고 인근 지역과 상호교류 하였으며 충주권은 한성권과 연결되어 있었다. 도로교통은 조선시대 충주의 도시발달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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