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 수운과 충주의 지역성

전홍식 교통대학교 한국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 기사입력 2016/08/30 [13:12]

남한강 수운과 충주의 지역성

전홍식 교통대학교 한국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 입력 : 2016/08/30 [13:12]

한강은 금강산에서 발원하는 북한강과 태백의 금대봉 검룡소에서 발원하는 남한강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한강은 영월에서 평창강, 주천강과 합류한 후 단양을 거쳐 충주로 흐르고, 충주에서 달천강과 합류하여 북서쪽으로 흘러 여주, 양평을 거쳐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하여 한강을 이룬다. 북한강은 한강의 제1지류로 지정되어 있고 실제로 한강의 본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남한강이다.
고대로부터 강 유역은 관개농업에 유리한 물이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청동기·철기 등 문물의 전파로 취락이 형성되고 선진 문물이 발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삼한시대 충주는 마한의 땅이었으며 충주지역의 성읍국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남한강과 충주는 보다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삼국 중에 남한강 유역의 충주를 가장 먼저 차지한 나라는 백제였다. 이어 고구려가 장수왕(475)대에 남하정책에 의해 한강유역을 점령하였다. 최종적으로 진흥왕(540~576)대에 소백산맥을 넘어 남한강유역을 차지한 신라에 의해 충주는 경주에 이어 두 번째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삼국의 치열한 남한강유역 진출을 위한 쟁탈전은 단순한 영토 확장 보다는 전략적·경제적 측면에서 내륙수로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조에 들어 조운제(漕運制)가 설립되면서 남한강은 내륙수로로써 확고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전국에 12개의 창고를 설치하였는데 남한강변에는 충주에 덕흥창, 원주에 흥원창이 있었다. 덕흥창에는 200석을 싣는 평저선(平底船) 20척을 두었다. 고려말 왜구가 준동하자 공민왕 20년(1371) 해운을 중단하고 내륙수로를 통해 전세를 운송하게 하였고 남한강유역의 충주와 원주의 창고로 집결되었다.
조선 건국이후 도읍지로 선정할 때 한강은 한양을 도읍지로 선정하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조정에서는 조세운송을 위한 수로관리에 만전을 기했으며 1394년(태조 4)에 수로전운소완호별감(水路轉運所完護別監)을 두고 용산강으로 부터 충주의 연천(淵遷)까지 7개의 수로전운소를 설치하였다. 조세의 보관을 위한 창고의 정비는 15세기에 확립되었고 남한강에는 가흥창과 흥원창이 있었다. 가흥창은 약 84,670석을 수납하였으며 전국에서 가장 많은 조세수납을 담당하는 창고였다. 그러나 조운선 운항과 수로 관리에 필요한 인력 확보 등에 어려움을 겪어온 조정은 전세의 수송을 사선업자에게 넘기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가흥, 목계, 흥원, 이포를 중심으로 사상(私商)과 선운업자(船運業者)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한강 수운을 통해 세곡의 운반뿐만 아니라 물품과 인적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물길과 물길이 만나는 곳과 육로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상점, 여각, 객주 등을 갖춘 취락을 형성하였다. 이중 일부는 상업포구로 발전하였다. 조선후기 전국 5대 하항의 하나였던 목계는 호수가 800여호의 취락으로 100여척의 상선이 운집하는 마포나루 다음가는 항구로 성장하였다. 목계에는 미곡, 참깨, 어물, 소금, 청과물, 우마(牛馬), 석유, 담배 등의 객주가 있었다. 목계를 비롯한 남한강 유역의 하항에는 어염(魚鹽)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소금과 어물은 남한강 수운의 상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다.
조선시대 육로가 행정통신로의 성격이 강했다면 수로는 화물수송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남한강유역의 교역은 수로를 통해 발달하기 시작하여, 조선후기 장시의 발달과 함께 육로와 수로가 결합된 교역망을 이루게 되었다. 충주는 경기, 강원, 충청, 경상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결절지에 입지하고 남한강 수운을 통한 유리한 교역조건을 갖추고 있어 지역의 상업중심지로 발달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충주가 동래로·봉화로와 남한강 유역의 도시 가운데 인구와 경지면적 등 인적 물적 요건에서 최고 수위의 도시라는 사회경제적 조건은 상업을 촉진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남한강 수운은 교통로, 조세수송로 일뿐만 아니라 상품교역이 이루어지는 삶의 터전이자 지역경제의 중심이었다. 남한강 수운은 일제침략과 강점이후 경부선(1904), 충북선(1928) 등의 철도 부설과 새로운 도로 개설로 점차 위축되면서 1950년대 이후 소멸되었다. 더불어 남한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일 문화권과 의식도 단절되거나 약화되었다.
지난 여름 충주댐 선착장에서 월악나루까지 유람선을 탈 기회가 있었다. 유람선에서 흘러나오는 관심도 준비도 없는 안내방송을 들으면서 남한강과 충주사람들의 역사, 문화, 전설, 삶의 애환, 강한 생활력과 활달한 기상마저 아름다운 풍광 그 아래 수면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까운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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