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침략과 도청이전

전홍식 교통대학교 한국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 기사입력 2016/08/30 [13:35]

일제의 침략과 도청이전

전홍식 교통대학교 한국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 입력 : 2016/08/30 [13:35]
도(道)가 우리나라의 행정구역이 된 것은 고려시대 5도 양계가 그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 충청, 전라, 강원, 함경, 평안, 경상, 황해도의 8도제가 시행되었다. 1895년 을미개혁 때에는 8도를 폐지하고 23부를 신설하였다. 이듬해인 1896년 8월에는 지방제도 개혁에 의해 8도 중 함경도, 평안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5도를 남북으로 나누고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를 합쳐서 13도로 개편되었다. 8도에는 감영(監營)을 두었고, 23부가 신설되면서 감영대신 부청(府廳)이라고 호칭하였다. 13도를 채택할 때는 관찰부로 하였고 1910년 강제 병탄이후 도청으로 변경되었다.
충주는 조선건국이후 충청감영이 설치되었으나 임진왜란이후 감영이 공주로 이전하였다. 개항이후 다시 행정중심지가 되어 1895년에는 23부체제의 충주부, 1896년에는 13도 체제에서 충청북도 관찰부가 설치되었다. 관찰부에는 관찰사 1명, 주사 6명, 총순 2명, 순검 30명, 서기 10명, 통인 4명, 사령 15명, 사용 8명, 사동 8명이 임명되었다. 행정중심지인 도청이 도시와 주변지역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한 것이기 때문에 도청의 위치는 도시 위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충주는 충청북도의 관찰부가 됨으로써 내륙의 행정중심도시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다양한 분야가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고 경부선철도가 부설되면서 상황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내륙의 수운을 중심으로 발달하던 운송체제가 경부선철도에 의해 위축되었고 빠르게 철도운송체제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경부선철도를 기축으로 침략자를 위한 새로운 지역과 도시공간이 형성되었고 기존의 지역체제 또한 재편되었다. 경부선철도가 개통되고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충주는 침략자에게 경부선에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오지(奧地)로 인식되었다. 충청북도 관찰부인 충주의 정치적 경제적 지리적 취약성을 지적하는 신문 기사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도청이전을 획책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제의 조선지배는 군사력과 행정조직에 의해 가능하였다. 따라서 군사력의 동원과 행정체제 운영의 효율을 높이는 것은 일제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일제는 대륙침략을 위한 기반조성,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한 행정의 편의성과 효율성, 행정운영의 기동성과 주민통제를 목적으로 경부선과 경의선의 요충지로 관찰부를 이전하고자 하였다.
충청북도 도청은 1908년 6월 일제의 식민정책에 의해 강제로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하였다. 『청주연혁지』 (1923)에는 충청북도 관찰부의 이전이 충청북도 서기관 신곡탁남(神谷卓男)이 제안하고 내부차관의 재량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관찰부이전과 같이 식민통치의 기본방향을 결정하고, 도시와 주변지역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사회적 이목과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사건을 관찰부의 일개 서기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은 일제의 기만적인 술책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조선통감이 결정하고 통감부 차관과 충청북도의 서기관 신곡탁남(神谷卓男)이 담당자가 되어 실행에 옮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신곡탁남(神谷卓男)이 통감부에 관찰부 이전을 건의하고 통감부가 승인하자 두 명의 소속 동료에게만 알리고 다른 관리들에게는 비밀을 유지한 채 몰래 보따리를 챙겨 청주로 향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관찰부이전이 철저한 비밀 속에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식민권력의 은밀하고 독단적인 결정에 의한 관찰부이전으로 인해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적 영향을 받는 충주와 충주사람들의 의견은 처음부터 철저히 배제되었다. 갑작스럽고 황당한 결정에 유감을 표시하고 청원을 한 유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격적인 이전 반대운동을 전개하지는 못했지만 이전반대에 대한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는 물론이고 경제규모가 크지 않고 사회가 다양하게 분화되지 않은 전통사회에 있어서도 관아의 위치는 도시의 격을 결정하고 지역발전을 유도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에 의한 도청이전으로 충주는 발전기회와 성장 가능성을 상실하고 위축되었다. 일제의 침략과 강점시기를 거치면서 충주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위상도 급격히 축소되어 지방의 중소도시로 전락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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