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진영(鎭營)의 발자취(1)

전홍식 교통대학교 한국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 기사입력 2016/08/30 [13:41]

충주 진영(鎭營)의 발자취(1)

전홍식 교통대학교 한국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 입력 : 2016/08/30 [13:41]
역사를 알고 싶은데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난해한 한문, 지명, 용어 등이 역사를 어렵게만 느껴지게 하는 선입견의 주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공부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쉽게 설명하고 이해를 도와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어찌 보면 그 모든 것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평범한 사실을 되새긴다면 오히려 편하게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지난 시간과 공간을 이해하는 이러저러한 방법이 있을 수 있지만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현장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직접 가서 머릿속에 그려보고, 느껴보고, 걸어도 본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매번 스치듯 지나가지만 문득 충주 진영(鎭營) 터가 궁금해서 찾아가 보았다. 진영 터는 충주시 성남동 470번지 일대로 칠금동으로 이전하기 전 옛 충주세무서 자리이다. 충주진영은 임진왜란 중인 1595년 12월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전기 방어체제인 진관체제와 유사시 적의 침입에 대항하여 각 지역의 군사를 요충지에 집결시킨 다음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가 지휘하도록 하는 제승방략은 탄금대 전투에서 보듯이 본진이 무너지면 후방이 순식간에 적에게 노출된다는 점에서 방어체제로서 문제점이 많았다.
조선정부가 명나라 『기효신서(紀效新書)』의 병법을 도입하여 진관체제와 제승방략의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지방군(地方軍)인 속오군(束伍軍)을 창설하면서 진영이 설치되었다. 충주는 남대문–판교–용인–충주–문경–상주–대구–동래로 이어지는 육로와 남한강 수로의 중심도시이기 때문에 전략적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시되었다. 진영에 영장(營將)을 파견하느냐 아니면 목사가 영장을 겸임하느냐를 둘러싸고 존속, 폐지를 거듭하다가 1654년(효종5)이후 정식으로 영장이 파견되었다. 충청도에는 홍주에 전영(前營), 해미에 좌영(左營), 청주에 중영(中營), 공주에 우영(右營), 충주에 후영(後營)의 5진영이 설치되었다.
충주진영은 충주읍성의 남문 밖 도로 변에 위치하였다. 충주 진영의 건물은 호서읍지(1871년)의 진영사례에 의하면 동헌 21칸, 삼문 4칸, 수직방 4칸, 폐문루 8칸, 내아 8칸, 책방 3칸, 장청 7칸, 집사청 5칸, 교사청 4칸, 영리청 7칸, 흡창방 3칸, 군뢰청 12칸이었다.
진영의 동헌, 삼문, 흡창방은 경오년(1870년)에 개축되었다. 읍성내의 청녕헌도 경오년(1870년) 8월에 화재가 발생하여 10월에 28칸으로 다시 세웠다. 아울러 동익랑 4칸을 중수하였고, 서익랑 5칸을 다시 세우고 3칸을 중수하였으며 아울러 내삼문 5칸, 중삼문 3칸 또한 중수하였다. 이들 건물을 건축하기 위해 필요한 자재는 남산 창룡사와 인근의 절을 뜯어다가 사용하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창룡사 입구에는 절의 연혁을 소개하면서 충주목사 조병노가 1870년에 창룡사를 훼철하여 관아를 지었다는 분노어린 내용의 간판이 서있었다. 1983년 청녕헌 보수공사를 위한 지붕 해체 과정에서 절의 시주자 명단이 조각된 기와가 발견됨으로써 절을 뜯어서 관아 건물의 자재로 사용하였음이 밝혀졌고 창룡사의 분노가 이유 있음이 확인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인근 사찰을 뜯어다가 가흥창을 지었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유교이데오르기가 지배하는 조선사회에서 관청이 사찰을 철거하고 그 자재로 관아건물을 짓는 것은 다반사였고 당연시 되었던 것이다.
충주진영의 최고 지휘관은 정3품의 영장이었고 그 예하 4,447명의 장졸이 배치되었다. 충주영장은 읍내 줄다리기에서 충주목사가 서편 영수를 맡는데 대해 동편 영수를 맡는 지역 내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중주진영은 평시에는 충주, 제천, 영춘, 단양, 청풍, 괴산의 군병들의 훈련을 담당하였고 유사시에는 조령에서 서울로 진출하는 일본군을 격퇴하는 임무를 맡았다. 청군(淸軍)이 침략할 경우에는 남한산성으로 이동하여 서울을 지원하고 왕을 보호하는 군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치안기능으로는 도적체포, 호랑이 포획, 천주교도의 체포, 변란 진압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읍성의 성 돌이 발견되면서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읍성과 도시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과 이해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공감대였다. 읍성을 중심으로 한 역사도시 공간에 대한 지식을 나누고 힘과 지혜를 모아 한 발을 내딛기 위한 용기가 무엇보다 필요했다. 역사도시 복원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확산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먼저 참여를 통한 답사와 설명회를 갖는 방법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었다. 이런 저런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머뭇거릴 겨를도 없이 답사 일정이 정해졌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29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성내 옛길을 찾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출발점은 청녕헌 앞마당이었다. 수많은 성내의 건축물들이 서로가 서로를 맞대고 이어졌을 지난 시간과 공간은 흘러가 버렸다. 1896년 을미의병 전쟁의 전투과정에서 일부 관아건물들이 소실되거나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일제강점이후 대부분의 건물들이 자취를 감추고 일본식 건축물로 대체되었다. 해방이후 일본식 건물이 사라지고 현대식 건물로 바뀌는 격동의 시간 속에서 오히려 청녕헌, 제금당, 산고수청각이 굳건히 우리 앞에 서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모든 것이 잘려나가고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청녕헌, 제금당, 산고수청각을 향해 달려오던 옛길 또한 잘라지고 상처입고 고통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옛길의 많은 부분이 직선도로로 변형되거나 확장되었고 새로운 건물에 막혀서 끊겨버렸다. 그 가운데에서도 원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부분도 존재하였다. 우리는 청녕헌 앞마당에서 출발하여 그 옛길을 찾아 나섰다.
일제는 1913년에서 1916년까지 시구개정을 시행하면서 그것을 기념하고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충주발전지』(1916)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충주발전지』의 시구개정도에는 조선시대 옛 도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옛길의 전체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일제가 어떠한 이유로 시구개정도에 옛길의 흔적을 남겨두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시가지 위에 새로이 직선형 도로를 그리면서 옛 도로의 흔적이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우체국 맞은 편 돌담길의 따라 객사터까지 이어지는 골목길을 따라 갔다. 객사는 현재의 케이티 자리에 있었다. 객사 옆 길에서 설명과 토론을 하고 읍성의 대로로 나섰다. 읍성의 남문에서 북문으로 이어지는 대로는 성내와 성밖의 장소를 연결할 뿐만 아니라 서울을 비롯한 다른 도시와 연결되는 조선시대 중심도로였다. 북문이 있던 보문당 앞 네거리에서 북문과 도시의 변화상을 살펴본 다음 성 밖으로 나가 향교를 찾아 나섰다.
북문사거리에서 도로를 건넌 다음 샛길을 따라 걸었다. 북문다리를 건너 향교로 이어지는 옛길은 아직도 많은 부분 옛 자취를 간직하고 있었다. 향교에서 설명과 함께 한 숨을 돌린 다음 동문으로 발길을 돌렸다. 교현천으로 다시 나온 다음 동촌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었다. 기대와 호기심 가득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문화회관 앞 동문지에 도착했다. 동문지에서 다시 옛길을 따라 최종 목적지인 남문의 성돌 발견지에 도착함으로 답사일정은 마무리됐다.
첫 행사이기에 걱정이 앞섰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20여명이 참여하였고 열기 또한 뜨거웠다. 답사에 참가하신 분들이 비교적 후한 평을 해주셔서 고마운 마음과 함께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특히 김현길 교수님께서는 평소 읍성복원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으며 이번 행사에도 결코 짧지 않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답사에 참석하시어 힘을 실어주셨다. 지면으로나마 감사드린다.
충주읍성을 중심으로 한 도시공간은 충주역사의 보고(寶庫)이며 충주의 미래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고 관심 밖에 있었다. 그 과정에서 보존하고 가꾸고 되살리는 것은 고사하고 훼손되고 왜곡되었다. 역사도시 공간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알지 못했고 멀게만 느껴졌던 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에 이번 답사는 역사도시를 찾아가고 이해하는 첫걸음 이었다 데 의미가 있다. 도시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지속적인 강의, 답사, 설명회 등을 개최하고 학생, 단체, 개인 등 맞춤형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시민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도록 노력해야한다. 시민들의 참여를 통한 관심과 애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민들의 뭉쳐진 힘과 노력에 따라 역사도시의 현재와 미래는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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