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김기철에 대한 기억

전홍식 교통대학교 한국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 기사입력 2016/08/30 [13:54]

일제강점기 김기철에 대한 기억

전홍식 교통대학교 한국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 입력 : 2016/08/30 [13:54]
일제의 패망이 임박한 것을 눈치 챈 충주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매각하거나 가까운 조선인들에게 관리나 보관을 부탁하는 등 마지막 몸부림을 쳤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일본인들은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해 도주하였고 원구일이(原口一二)도 해방이후 종적을 감춘 것으로 보아 그 틈에 끼어 일본으로 도망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이 사라진 읍내의 적산건물은 조선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충주 일본인사회의 최고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원구일이(原口一二)의 가옥(현 성내동새마을금고)은 일시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김기철이 차지하였다. 이십대 후반의 젊은이가 본정(本町)의 최고 건물에 입성했다는 것이 의아해 할 수 있지만 해방이후 그가 충주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 단장을 역임하는 등 충주 우익의 대표적인 인물로 성장한 사실을 감안하면 충분히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김기철은 일제시기 친일경력으로 인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었던 친일 세력을 대신해 좌익척결 등 다양한 정치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1948년 제헌의회 선거에서 대동청년단 소속으로 당선 되었다.
1954년 제3대 총선거에서는 자유당 공천으로 충주에서 당선되었고, 제5대 선거에서는 민주당으로 당선되었다.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자 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활동하였고 체신부장관을 역임하였다.
겉으로는 화려한 것처럼 보이는 그의 경력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일제강점기의 경력이다. 김기철은 1917년 음성에서 출생하였음에도 어떤 자료에는 서울로 기록되어 있다. 학력에 대해 일본 관서대학 전문학부 법과 중퇴, 1938년 만주 길림사범학교 졸업으로 기록되어있다. 학교 졸업 후 교편을 잡았고 만주 신성우급교 교장을 역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어떤 기록에는 신경조선청년단 농장문화부장으로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충주에서 김기철과 같은 시대를 살아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지역 어른들의 증언은 달랐다. 김기철은 1930년대 말경부터 충주군청의 내무과 총력계의 촉탁으로 근무했다. 김기철이 일본과 중국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금시초문이며 선거 때마다 학력과 경력이 바뀌고 없던 것이 추가 되었다는 것이다.
5년 전 증언하신 분은 “가미시바이”를 하고 다녔던 김기철을 기억하였다. “가이시바이”는 그림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설명하는 종이 연극이다. 김기철은 면단위 동리까지 다니면서 황국신민, 내선일체 등 일제의 식민정책을 찬양하고 전쟁에 나가라고 떠들고 다녔다는 것이다. 교현학교를 졸업하신 어른은 김기철의 “가미사비이”를 강당에서 보았고 ‘내 머리를 세뇌한 놈’이라고 하였다. 그 후 김기철을 기억하고 있는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해방 후 김기철이 정치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가미사비이”를 해서 언변이 좋고 일제시기 지역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지역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풀뿌리 친일협력자인 김기철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디지털충주대전』과 같은 곳에서는 역사를 왜곡하여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희생하신 선열들을 모욕하는 것으로 반드시 고쳐져야 할 부분이다. 아무리 왜곡을 하고 덧칠을 해도 친일협력자가 독립운동가가 될 수는 없다. 진실은 밝혀지고 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인 것이다.
최근 일제시기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근무하고 계림회라는 친일 협력단체를 조직하고 활동한 권태하와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하고 경성부의회 의원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정상희를 조명하고 선양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우려스러운 일이다.
1966년 『친일문학론』을 발표하여 민족 내부의 자성을 촉구한 임종국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친일한 일제하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참회와 반성이 없었다는 해방 후의 현실이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발본색원의 광정(匡正)이 없는 한 민족사의 기강은 헛말이다. 민족사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조상임을 면할 날이 없게 되는 것이다”. 오늘 다시 새겨야 할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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