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객사의 구조와 변화

전홍식 교통대학교 한국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 기사입력 2016/08/30 [14:01]

충주객사의 구조와 변화

전홍식 교통대학교 한국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 입력 : 2016/08/30 [14:01]
도시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은 그 지역의 관아건축이다. 관아건축 중에서도 가장 중심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객사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객사는 왕권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지방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으며, 외국 사신이나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하였다.
객사가 언제부터 설치되기 시작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고려시대의 기록에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고 유숙시키기 위해 객사를 건립하였던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이전에도 유사한 기능을 하는 건축물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건국 이후 중앙집권적인 지방제도가 확립되면서 객사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충주객사는 진산인 대림산을 배경으로 충주읍성의 정문인 북문 안에 위치하였다. 객사 동편으로 연못인 상연당(上蓮塘)과 하방지(下方池)가 있고 그 주위에 경영루(慶迎樓)와 청연당(淸燕堂)이 자리 잡고 있어 최고로 경관이 좋은 곳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객사는 전국적으로 전체의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사례는 없고, 남아있는 경우도 객사 내의 건물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이마저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심하게 변형되어 원형 고증이 어려운 실정이다.
충주객사 역시 완전히 소실되어 원형고증이 곤란하지만 각종 기록에 비춰보았을 때 정청과 좌우익헌, 동대청과 서대청, 중삼문, 외문루를 갖춘 중층적인 공간구조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부적으로는 모든 의식이 치러졌던 중삼문 안쪽의 정청과 좌우익랑이 있는 주공간, 휴식과 유흥을 위한 정원과 객사를 지원하기 위한 건물 등이 배치된 부속공간, 그리고 주공간에 들어가기 위한 중삼문, 외문루의 진입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충주객사의 정청인 중원관(中原館)의 기단부는 좌우익헌의 기단부에 비해 약간 높은 형태로 조성되었는데 이는 건물의 상대적 위계를 나타내 주는 것으로 조선시대 객사양식의 일반적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건국되었으므로 전패를 봉안하고 고을 수령이 국왕에게 유교적 의례를 올리는 기능이 중요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초기 객사는 왕명을 띠고 내려오는 사신접대의 기능이 주로 이루어졌다. 17세기 들어 사림의 성장과 예학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유교의식을 행하는 곳으로 중요시 되었다. 수령주도의 관치질서가 자리 잡는 18세기 이후에는 전패봉안(殿牌奉安)과 행례처(行禮處)로서의 객사의 성격이 더욱 강조되어 국왕을 상징하는 객사가 도시 내의 어떤 시설보다 중요한 시설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객사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개항과 일제침략이 가속화되면서 부터이다. 먼저 지방관아의 건물과 객사에 영향을 미친 것은 행정구역 개편이다. 1895년 5월 지방관제가 8도에서 23부제로 개편되면서 폐지되는 객사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러일전쟁으로 많은 객사가 소실되었고 일본군 병사들의 숙소로 전용되었다. 사회적 혼란과 제도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객사는 다양한 용도로 전용되기 시작하였다. 1907년에는 보통학교와 관공서에 황제의 어진이 봉안되면서 궐패(闕牌)의 상징성이 축소되고 객사의 위상도 감소되면서 객사제도 자체가 폐지되는 수순을 밟았다.
충주객사는 1896년 을미의병전쟁 당시의 피해로 인해 일부 소실되었고 일제침략과 식민지배의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방치되고 쇠락하였다. 일제는 1915년에 중원관을 개수하여 충주간이농업학교 교사로 사용하였다. 1922년 2월 간이농업학교가 폐교되면서 변형된 객사건물 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근래 들어 지역의 역사적 문화공간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도시별로 읍성 시설에 대한 정비 복원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하거나 준비없는 급속한 복원으로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획일적인 복원으로 끝나는 사례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관아시설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 중에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충주객사에 대한 관심은 높지 않다. 충주 도시경관의 역사적 맥락의 재생을 위해, 그리고 미래의 객사복원을 위해 기초적인 조사와 연구는 물론이고 시민들의 인식을 높이기 다양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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