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이 기막히다, 살인자의 기억법

신옥주 | 기사입력 2017/09/12 [09:53]

이 소설이 기막히다, 살인자의 기억법

신옥주 | 입력 : 2017/09/12 [09:53]
▲ 신옥주 주부독서회원     ©

그동안 꽤 많은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는 내게 김영하라는 작가는 이해하기 힘든 작가에 속한다. 그의 책 중에 100페이지 정도의 얇은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벌써 서너 번을 읽었는데도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살인자의 기억법역시 150페이지의 비교적 짧은 소설인데 소설의 길이보다 훨씬 긴 여운을 주는 소설이었다. 그의 작품을 여러 권 지니고 있고 읽기도 했으나, 이 책만큼 몰입도가 넘치는 책은 보기 드물다. 문체도 깔끔하고 문장도 짧고 간결하며 군데군데 여백이 있어 읽기가 매우 수월한 책인데도 작가 특유의 심리묘사가 탁월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소설은 알츠하이머에 걸려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연쇄 살인마 김병수가 일흔이 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치매에 걸린 연쇄 살인마라는 설정부터 이미 독특하다. 25년 전 마지막 살인을 한 뒤 은희라는 딸을 키우며 동물을 치료하는 수의사 김병수. 그는 회상과 기억이 반복되면서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망상인지 구별이 모호해지기도 한다. 의사는 가까운 기억부터 상실될 거라 말하고 실제 망각하는 기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김병수는 우연히 마주친 또 다른 연쇄살인마 박주태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보고 딸 은희를 지키기 위해 대립한다.

웃기게도 김병수는 금강경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린다. 살인을 멈춘 것은 다음에 더 잘 할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란다. 문화강좌로 시 강의를 듣는 살인범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살인범의 모습과도 상이한 모습이며, 독특한 이력뿐만 아니라 자기가 죽인 여자의 딸을 데려다 은희라는 이름으로 키우기까지 한다. 주인공만 생각해도 정신없는데 박태주는 끊임없이 김병수 근처를 배회하거나 부딪친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이고, 어떤 게 망각일까?

결말을 읽고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앞 장으로 다시 돌아가 읽고 또 읽었다. 이런 글을 쓰는 작가에게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보냐. 책을 읽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마지막 반전은 말 그대로 소름이다. 내가 생각한 모든 결말을 깨는 반전이었다. 내가 믿는 세상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다가오는 공포를 어느 것과 견줄 수 있을까. 내 기억을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으며, 내가 아는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게 된다는 것, 내가 아는 사실이 사실이 아니게 되는 상황에 부딪친다. 연쇄살인마보다 치매가 더 공포스럽게 다가오기는 처음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어도 나는 믿을 수 있어야 하는데 나조차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란 얼마나 공포스럽고 두려운 세상일지 짐작도 못하겠다.

단숨에 책을 읽은 나는 결말이 이해되지 않아 눈 뜨자마자 혼자 영화를 보러 갔다. 보통 원작이 좋으면 영화가 실망스러운 적이 많지만 그래도 움직이는 영상으로 작가의 심리를 쫓아가고자 함이었다. 영화의 결말은 소설과 다르지만 그건 그것대로 빛난다. 소설에서 딸 은희는 사실 요양보호사였으며 살해당하지만, 영화에서는 친딸은 아니지만 끝까지 딸로 존재한다. 소설에서는 모든 사실이 망상으로 귀결되는데 영화에서는 살인범 태주와의 액션이 나온다. 설경구는 역시 이름값을 하는 멋진 배우로 기억이 사라질 때 한 쪽 안면근육을 실룩거리는 장면이 압권이다. 영화는 영화다운 결말이고 소설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작가가 너무 밉고 분하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행운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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