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책

김영희 | 기사입력 2017/09/27 [10:33]

가을 산책

김영희 | 입력 : 2017/09/27 [10:33]
▲ 김영희 시인     ©

우리 집 뒤꼍은 꽃피는 가을이다. 집 뒤의 새로 단장한 도랑이 지난 가을비에 세수를 하더니 더욱 맑다. 시내 테두리에 살다보니 창문을 열면 논밭과 과수원이 보이고 계명산이 보였다. 덕분에 봄이면 개구리 합창소리가 들리고 여름이면 매미들의 우렁찬 소리와 온갖 새들이 지저귀었다. 가을이면 귀뚜라미가 시절을 읊고 겨울이면 참새들이 재잘거렸다.

그러나 몇 년 사이에 집 뒤 논밭에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서 하늘이 보이질 않는다. 아파트 짓는 동안에는 시끄러워 잠을 이루지 못한 나날이 많았다. 귀마개가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자연의 소리 대신 사람들의 살아가는 소리가 정답게 들려온다. 밤에 아파트에 불이 켜지면 마치 서울의 강남 같은 분위기가 난다. 아파트가 생기면서 도랑을 건너는 좁다란 다리가 생겼다. 그 다리를 건너다보면 도랑가에 수많은 작은 꽃들이 피어나 가을을 반긴다. 졸졸졸 흐르는 물이 구름을 담아 흐르고 하늘도 파랗게 비춘다.

나의 시간도 구름처럼 흐른다. 구름 같은 모양으로, 구름 같은 빛깔로 덧없이 흐른다. 흘러가는 구름사이로 가을의 소리가 들린다. 가을의 소리가 묵밭 같은 내 가슴을 연다. 가슴속에서 시간의 쭉정이들이 쏟아진다. 가을 들판의 곡식 익어가는 소리가 빈 가슴을 채운다. 엉성한 어느 울타리에서는 활짝 핀 가을 장미가 자기의 존재를 알린다. 열심히 걸어온 은행나무들의 발 냄새를 바람이 씻는다. 열매를 키운 모든 숲은 조용히 자신을 내려놓을 준비를 한다.

강가에 나와 해 저무는 노을을 등지고 걷는다. 노을은 아무리 붉어도 온기가 없다. 노을빛에 물든 강이 붉게 흐른다. 강물은 언제나 소리 없이 흐르는가. 물안개가 숨소리처럼 피어오른다. 탄금대 건너 강과 강 사이에 있는 이름 모를 섬에 <포옹>섬이라 이름 붙여본다. 섬의 양 끝이 포옹하는 것처럼 보여서이다. 나는 포옹 섬을 볼 때마다 거기에 오두막 집하나 짓고 세상을 포옹하며 살고 싶다. 장마가 지면 포옹 섬이 아스라이 묻힐 것 같은 생각에 미치자, 부질없는 생각에서 깬다.

노을이 야위는 논둑길로 접어들었다. 논에는 통통 여무는 벼들이 서로를 다독이며 황금빛을 발하고 있다. 허기진 마음을 채워주는 들길을 지나 차들이 번개처럼 오가는 큰길가로 나왔다. 길가에는 섹시한 여인이라는 꽃말을 지닌 가우라가 오가는 이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요즘은 사람의 길은 거의 차만 보일 정도다. 시내를 벗어난 곳이면 사람들은 차속에 들어있어서 걸어가는 사람은 가끔씩 눈에 띌 뿐이다. 나는 자동차면허증은 있어도 차를 가져 본 일이 없다. 그래서 대중교통이 아니면 거의 걸어서 다닌다. 한 때 운전을 하고 싶어서 꿈속에서 운전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운전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래서 대중교통이 편하고 좋다. 그러기에 난 가끔 세상에게 미안하다.

오늘은 오랜만에 가을풍경이 그림을 그리는 충주를 걸었다. 충주는 부모님의 고향이고 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사는 곳이고, 아들딸이 자란 곳이다. 걷다보면 하나 둘 추억이 떠오른다. 더러는 안 좋은 추억도 있지만, 살다보면 좋은 일만 있을 수 있겠나 싶어 마음을 편하게 한다. 집 주위도 둘러본다. 바로 옆집은 집이 헐리고 주인 없는 터에는 온갖 무성한 풀이 담을 넘는다. 우리 이웃은 집 주변을 깨끗이 한다. 담배꽁초 하나라도 보면 서로 줍는다. 서로 얼굴 보기는 쉽지 않지만 쾌적해지는 집주변을 보면서 좋은 기운이 느껴진다. 우리 집 뒤꼍의 꽃피는 가을처럼, 내 삶의 뒤안길도 잔잔한 꽃들이 피어날 수 있을까.

구름이 가을을 타고 유유하다. 풀벌레소리도 멀어지는 이 밤 나는 마당에 나와 한 두 개의 별을 바라본다. 별이 너무 멀다. 별이 많이 놀러오는 집에 살고 싶다. 구름 같은 시간이 흐른다. 나는 방에 들어와 책을 펼친다. 깊어가는 밤이 사색의 벌초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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