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대화
손문숙
그녀의 하얀 백지 위로 자꾸 까만 글씨를 쓴다 실체 없는 정답을 견인하며 가슴을 밟고 지나가는 저 그림자
어서 오거라 구두점 하나의 설움과 낱자 하나의 통증을 눈빛 가득 들어주는 봄이여 낙엽처럼 쌓인 언어의 늪에서 저 흰 눈발 가득 난무하는 백지여
*손문숙(1961~ ): 강원 원주 출생, 춘천교육대학졸업. 문학공간으로 등단. 교육평론과 동화문학 상 동화신인상. 월간아동문학 동시시인상. 한국문인협회. 충북시인협회. 충주문인협회. 중원문학회 회원. 시집: 님의 뜨락 시비 : 충남보령
때때로 작가는 써야 한다는 강박이 심할수록 머릿속이 하얗게 바랩니다. “실체 없는 정답을 견인하며 / 가슴을 밟고 지나가는 저 그림자”에 사로잡힙니다. 그림자 역시 실체가 없으니 까만 글씨를 쓰는 행위조차 갈피를 잡지 못해 백지를 보탤 뿐입니다.
이가 시린 한 겨울의 설원, 아무것도 쓰지 못한 백지 앞으로 따스한 봄날이 말을 건넵니다. “어서 오거라 / 구두점 하나의 설움과 / 낱자 하나의 통증을 / 눈빛 가득 들어”줍니다. 봄의 귀는 한없이 깊어서, 시인이 골똘히 생각한 구두점 하나의 설움과 낱자 하나의 통증까지 헤아려 잎을 피우고 꽃을 피웁니다.
봄 씨앗들은 알고 있습니다. 지난 해 가을부터 “낙엽처럼 쌓인 언어의 늪에서 / 흰 눈발 가득 난무하는 백지” 위를 헤매던 창백한 언어들을 기억합니다. 백지 위에 잎을 내어 그리고 꽃을 피워 그립니다.
그리하여 이 봄날 코로나가 창궐하는 세계에도 꽃은 피고, 희망과 절망을 뒤섞으며 봄은 왔습니다. <백지 대화>를 읽으며 손문숙 시인의 맑고 순수한 얼굴을 떠올립니다, T.S 엘리어트가 명명한 잔인한 달 4월과, 아픔이 묘하게 겹쳐옵니다. 어두운 마음속에서도 모든 것을 아름답게 읊어 줄, 그대 시인이여 아프지 마소서!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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