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새재에서 수안보까지 - 5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18 [10:28]

작은 새재에서 수안보까지 - 5

김희찬 | 입력 : 2023/09/18 [10:28]

 

20세기 전반기에 일제에 의한 침탈이 본격적인 수안보온천 개발사로 자리하며 그것이 곧 수안보온천사인 것처럼 알려져있다. 고려시대 상황은 파악하기 힘들지만, 조선시대에 수안보온천을 이용한 이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서 이용사례와 당대 사람들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詩)로 남겨진 경우가 많다. 걸으며 만나는 여러 곳 중에 시 한 수로 그곳의 의미와 상황을 알 수 있는 곳이 수안보온천과 1592년에 있었던 탄금대전투의 참상이다.

수안보온천을 이용한 첫 사례는 1453년의 단종실록 기사에서 확인된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황해도는 여러 해 실농(失農)하였고, 또 중국과 우리 나라 사신의 송영(送迎)하는 것 때문에 조잔(凋殘)한 폐단이 매우 심합니다. 이제 들으니, 안평대군(安平大君)이 해주(海州)의 온정(溫井)으로 목욕을 하러 간다고 하니, 지나가는 곳의 여러 고을에서 노고와 비용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충청도는 곡식이 약간 풍년이니, 청컨대 온양(溫陽)이나 또는 안부(安富)의 온천으로 가도록 명하소서.”

하니, 전지하기를,

“안평대군이 말하기를, ‘온양은 세종 대왕께서 일찍이 임행(臨幸)하던 곳이라 차마 이를 보지 못하겠으며, 안부는 연창위(延昌尉)가 지금 목욕하고 있으므로 부득이 해주로 향하는 것입니다.’ 하므로, 존장(尊長)의 말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공억(供億)은 대군(大君)이 스스로 마련할 것이니 반드시 폐단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司諫院啓曰: “黃海道頻年失農, 又因中國及本朝使臣迎送, 彫弊莫甚. 今聞, 安平大君往浴海州溫井. 所過諸邑勞費必多. 忠淸道年穀稍稔, 請命往溫陽若安富溫井.” 傳曰: “安平云: ‘溫陽, 則世宗大王所嘗臨幸, 不忍見之, 安富, 則延昌尉時方沐浴, 故不得已向海州.’ 尊長之言, 不可不從. 凡供億, 大君自辦, 必無弊矣.”) (『단종실록』, 단종 1년(1453) 기사, 3월 12일)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 1415~1462)은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貞懿公主, 1415~1477)와 결혼한 인물이다. 실록의 기록처럼 안맹담의 수안보온천행은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1418~1453))의 만년 온천행에 대한 기사에서 함께 확인된다.

 

안평대군이 황해도 해주온천으로 목욕을 가겠다고 하자, 사간원에서는 황해도 지역의 여러 해 실농(失農)과 사신의 송영(送迎)으로 인해 민폐가 될 것을 우려하여 만류하였다. 대신 사정이 나은 충청도 온양이나 안부로 갈 것을 단종에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안평대군은 온양온천의 경우 부왕인 세종께서 행차하셨던 곳이라 꺼려하였다. 1450년에 세종이 붕어(崩御)한 상황이라 시기적으로 타당한 이유였다. 또한 안부온천의 경우에는 자형 되는 연창위 안맹담이 이미 가있기 때문에 해주로 가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든 비용은 자부담으로 하여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도 하였다.

 

이 기록은 지리지 등에 수안보온천이 구체적으로 기록되기 이전에 실제 이용상황을 보여준다. 왕실 인척과 고관들의 수안보온천 이용의 사례를 기록한 것으로 이후에 등장하는 여러 기사와 맥을 같이한다.

 

이어서 수안보온천 및 온정원의 전체적인 모습과 수해로 온천이 막힌 상황을 1476년에 쓴 김종직의 시에서 찾을 수 있다.

 

<안보온천에서 목욕하다(浴安保溫泉)>

※ 병신년(1476)에 큰 비가 여러 달을 계속 내려 냇물이 범람하여 온천을 충격하니, 해사(廨舍)의 판추(板甃) 또한 무너져서 마침내 냇물과 서로 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후로는 물이 매우 차가워서 목욕을 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온천 곁에 거주한 백성이 10여 호가 있었는데, 지금은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집수리하는 사람에게 물으니, 한 노인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세속에서 온 재상 등의 침탈로 인하여 모두 다른 고을로 유랑하여 옮겨 갔다.” 하였다. (丙申年. 大雨連月. 川水泛溢 衝激溫井 廨舍板甃亦潰 遂與川水通. 自是水甚冷 不堪沐浴. 舊時 泉傍居民十餘戶 今無一人. 問之修葺者 一老翁歎息云 “爲俗來宰相等侵牟, 皆流徙他邑.”)

 

垣廬摧壞井將堙 담장과 집 무너지고 샘은 곧 막히게 되었는데

修葺延豐吏數人 집수리하는 이는 연풍 아전 몇 사람뿐이다

病客要除身上垢 병객은 몸에 낀 때나 벗길 요량이지만

湯源見脅瀆中神 온천 근원은 도랑 귀신의 위협을 받은지라

或疑后媼慵敲火 혹은 땅귀신 할매가 불 잘 안 지핀다 의심하고

亦道天公解愛民 또한 하늘이 백성 사랑할 줄 안다고 말하기도 하네

十室村今流徙盡 열 집 마을이 지금은 다 흩어지고 없는지라

老翁欲語更沾巾 노인이 그걸 말하려다 다시 수건 적시네.

- 김종직, 『점필재집(佔畢齋集』 시집 권12)

 

이 시에서 1476년 8월 추석 밑의 수안보온천 상황이 확인된다. (음)7월 2일에 선산부사로 제수되었으나 병이 들어 뒤늦게 부임하던 길에 들른 당시 수안보온천의 상황이다.

 

온정원에 있었다고 하는 9칸 집의 경우 해사(廨舍)로 기록했다. 해사의 판추(板甃)가 무너졌다고 했다. 판추는 벽돌담이다. 온정원 주위에 벽돌담이 둘러쳐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석문천 쪽으로 둘러쳤던 판추가 석문천의 범람으로 말미암아 무너진 것이다. 온정원의 서쪽 담장을 치고 들어온 물은 이어진 온정을 쓸고 나가며 온천을 막아버렸다. 또한 온천 곁에 있던 민가 10여 채도 장마 피해를 입고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피해복구 현장에 있던 마을 노인에게서 또 다른 이야기를 듣는다. 마을 사람들이 떠난 것은 장마 피해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세속에서 온 재상 등의 침탈로 인하여 모두 다른 고을로 유랑하여 옮겨 갔다.”는 것이다. 온천을 찾는 고관들의 등쌀에 고통받던 상황에서 장마로 인해 집마저 파괴된 것을 핑계 삼아 삶의 터전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유랑을 떠난 것이다. 그 말을 전하던 노인은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온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마을이 홍수 피해로 파괴되고, 온정 역시 토사에 쓸려 메워진 상황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476년 8월 추석 밑에 선산으로 부임하던 김종직의 눈에 비친 수안보온천의 상황은 참담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수안보온천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은 온천욕을 통해 효과를 보고 쓴 후기일 것이다. 다소 길지만, 수안보온천 이용 후기라고 표현할 수 있는 정구(鄭球, 1490 ~ ?)가 1526년 여름에 풍을 맞아 고생하다가 수안보온천에서 요양하며 완치된 이야기를 적은 시를 보면 수안보온천의 이용 사례와 효능, 그리고 수안보온천이 계속해서 각광받은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안보온정에서 목욕하고, 45운[浴安保溫井四十五韻]>

十室延豊縣 조그만 연풍현에

孤村安保驛 외딴 마을 안보역

逶迤周道傍 구불구불 두른 길가에

茅茨八九屋 초가집 여남은 채

翳薈林莾間 빽빽한 수풀 흔들리는 사이로

有此神火宅 불다스리는 신의 집이 있어

觱沸泉涌出 콸콸 샘물이 솟아나는데

不火而蒸燠 불은 아닌데 따뜻한 김이 난다

炎炎溫若潤 푹푹 찌지만 매끄러운 듯

瑩瑩淸如玉 맑디맑게 푸른 게 옥 같기도

上中兩井分 상탕ㆍ중탕 둘로 나눈 온정엔

盈盈陽和脉 남실남실 따뜻한 기운이 움직거린다

廣尺深尺間 넓고 깊은 사이에

流惡氣淸適 나쁜 기운은 떠내려가 맑아지고

如爇活火湯 이글이글 탕속의 열기는

百疾之所藥 온갖 병에 약이로다

銷爍諸沴根 모든 악기의 뿌리를 녹이고 태워 없애

靈奇良難測 영험하고 기이함은 진실로 측량키 어렵구나

風痺與濕蹇 관절염에 다리 절뚝거리는

病者皆來浴 병자들 모두 와서 목욕하고

各滿深望還 간절한 바람에 제각각 만족하고 돌아가니

得效累千百 효과 본 게 누천백 사람이로다

上帝信深仁 상제님의 깊은 어짊을 믿으니

活人流霈渥 사람 살려냄이 빗물 쏟아지듯 두텁구나

哀此下土民 이처럼 땅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或罹邪惡毒 혹 못된 병에 걸리거나 악한 독에 취해도

銀潢一派傾 은하수 한 갈래 기울여

別鍾以火德 불의 덕으로 따로 부어

乃遣蒼水使 이에 수군절도사의 푸른 빛깔 보내주니

麾呵除穢惡 깃발 휘둘러 꾸짖어 더러운 것 덜어낸다

付之拯溺手 물에 빠진 사람에게 손을 내밀 듯

用演經濟策 경제책으로 펼쳐 쓰게 하니

苟有病邀浴 진실로 병 있어도 목욕물 맞으면

擧不分淸濁 맑고 탁함을 가리지 않고

一一儘容受 하나하나 다 받아들여

人人消癘虐 사람마다 창병이든 학질이든 사라진다

余於丙戌夏 나는 병술년(1526) 여름에

萍泛任飄泊 부평초처럼 떠돌다가

養生失營衛 양생할 영혈(營血)과 위기(衛氣)를 잃고

中彼風邪擊 풍을 맞게 되었다.

一身半不遂 반신불수가 된 몸을 

百年付床席 오래도록 돗자리에 붙이고 

灸艾幾百壯 쑥뜸을 몇 백번 떴고 

飮藥過千服 약 먹기를 천번 넘게 했으나 

尙未見效能 여태 효능을 보지 못하니 

百計無所屬 백 가지 방도가 소용없게 되었다. 

肩輿來投浴 견여(肩輿)에 실려와 욕장에 던져져 

老病倐有託 고질병 된 몸을 잠깐 맡겼더니 

如在深甑中 깊은 떡시루에 있는 듯 

堅坐難頃刻 잠깐 동안도 곧게 앉아 있기 어렵고 

心神漸消融 심신이 점점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膓冑爛如鑠 창자는 문드러져 녹아내리는 것 같았고 

汗透水漿翻 땀은 즙을 짜듯 물에 스며들었다. 

遍身濃滴滴 온몸에 이슬이 방울방울 

陰邪若雲卷 음사(陰邪)는 구름 말리 듯하며 

風耗如氷釋 풍모(風耗)는 어름 풀리 듯 

盡向毛孔散 모공이 모두 열리더니 

元氣稍來復 원기가 조금씩 돌아오는 듯 

血脉忽流通 혈맥이 갑자기 통해 흐르고 

肌膚潛沃若 살가죽에 기름이 흐르는 것 같았다. 

四體輕欲旋 온몸이 가벼워지며 피가 도는 것 같으니 

豈但收病脚 어찌 다만 다릿병을 거두리요. 

翩翩時學步 가볍게 때때로 걸음 연습을 하니 

不煩蒼藤力 푸른 등나무 줄기 휘듯 답답하지 않았다. 

針灸徒爲爾 침과 뜸이 이와 같으리요 

藥餌虗狼籍 약되는 음식의 낭자함이 하릴없어라. 

山藪信藏疾 산속 덤불에 병을 감춰버린 듯 

群病咸囿澤 모든 병을 동산 못에 모두 빠뜨린 듯 

或扶與載者 혹 부축받거나 실려온 사람들로 

道路紛絡繹 길은 온통 사람이나 수레로 뒤섞였다. 

跛者或能履 절름발이도 혹 능히 걷게 되고 

攣者或伸曲 오갈병자도 혹 허리 펴고 

疹者瘡痍合 마마 환자도 부스럼 자국이 닫히니 

矧患頭與腹 하물며 두통이나 복통 환자쯤이야. 

固未可儘信 진짜로 믿기 어렵겠지만 

一二記所覿 하나 둘 본 것을 적었다. 

水性元自冷 물의 성질은 본래 차가운 것이지만 

執熱胥以濯 열을 잡아 모두 씻음으로써 

反常有如此 이치와 다름이 이와 같으니 

顧有靈驗迷 돌아보건대 영험함에 미혹되었느니 

或云神所燎 혹 신이 도운 것이라느니 

或有硫黃石 혹 유황석이 있다고 하나 

雖未目所覩 비록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流傳自古昔 옛날부터 전해온 것이라 

物理未易詰 사물의 이치를 뒤집음이 아니요 

喟言歎冥漠 한숨 쉬며 까마득하게 멀고 넓음을 칭찬하는 말이다. 

泚筆書諸巖 붓에 먹을 묻혀 모든 바위에 쓰노니 

山空朝霞赤 빈산에 아침노을이 붉도다. 

- 정구, 『괴은유고』 권2, 시

 

곱씹을수록 단맛이 우러나는 것처럼 정구의 수안보온천 이용 후기는 다른 모든 설명을 필요치 않는다. 이처럼 우리의 고유한 수안보온천사는 노력하는 만큼 새로 쓸 수 있다. 다만 수안보온천을 홍보하면서 ‘王의 온천’을 표방하지만 왕이 온천욕을 하러 온 적은 없다. 아무리 물이 좋더라도 왕이 행차하기에는 온천리 자체가 비좁았기 때문이다.

 

작은 새재에서 시작한 하루 걷기는 6㎞ 남짓한 짧은 거리이다. 의견(義犬) 이야기를 시작으로 안부역(安富驛)이 가졌던 중요성과 역제가 폐지된 직후의 상황, 조정철과 홍윤애의 애틋한 이야기, 돌고개 서낭당과 함께 수안보 온정원(溫井院)에 덧씌워진 오해 등 하나하나 역사적 사실과 배경을 담고 있는 곳이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하고 걷다보면 15리의 짧은 길이지만 걷는 시간은 문경 새재를 걸어서 넘는 것 못지않게 길어진다. 피곤했을 하룻길을 옛 온정원 옆의 석문천가에 마련해 놓은 족욕장에 발을 담궈 씻어내는 것으로 마무리하면 개운할 것이다. (족욕장은 월요일에는 열지 않고 12시부터 문을 열어 놓아 오후의 족욕이 가능하다. 요금은 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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