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단월 충렬사(忠烈祠)와 충렬서원(충렬서원) ③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2/08/04 [11:11]

139. 단월 충렬사(忠烈祠)와 충렬서원(충렬서원) ③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2/08/04 [11:11]

 

▲ <충렬사강당> 충렬사 경내에 남아있는 강학 공간이다. 본래 충렬사 건물 앞에 위치해 있었다. 1978년 유적정화사업 과정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충렬서원의 서원 기능과 관련된 유일한 공간이다.

 

임경업이 근무했던 의주(義州)에서는 고을 치소에 ‘남사(南祠)’, 산성에 ‘북사(北祠)’라고 하여 각각 사당을 세워 임경업과 김상헌[金尙憲, 1570(선조 3) ~ 1652(효종 3)]을 제향하고 있었다. 정조가 1788년 11월에 취한 조취 중 일곱 번째는 남사를 ‘현충(顯忠)’, 북사를 ‘기충(紀忠)’이라 선액(宣額)하여 기리게 한 것이다. 의주의 임경업 사우는 선액하여 현충사(顯忠祠)가 되었다.

 

여덟 번째는 임경업과 부인 이씨에 대한 정표(旌表)를 단지 ‘정경(貞敬)’으로 한 것을 ‘유명총병조선국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시 충민공 임경업 증 정경부인 전주이씨 충렬쌍성지려(有明總兵朝鮮國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諡忠愍公林慶業贈貞敬夫人全州李氏忠烈雙成之閭)’로 고쳐 정려(旌閭)하도록 충주목사 정이환(鄭履煥)에게 명령해 시행토록 했다.

 

이때 내려진 <윤음>(綸音;국왕이 관인과 인민을 타이르는 내용을 담은 문서)이 <임충민공실기>에 수록되어 있다. <윤음>은 윤행임[尹行恁, 1752(영조 38) ~ 1801(순조 1)]이 지었고, ‘쌍성각(雙成閣)’의 액자(額子)는 호조판서 서유린[徐有隣, 1738(영조 14) ~ 1802(순조 2)]이 썼다. 쌍성각은 현재 살미면 세성리에 있다. ‘임경업 별묘(別廟)’ 옆에 있다. 쌍성각의 편액이 1788년에 제작되어 내려진 것이다.

 

1778년에 서원 수리를 시작으로 취해진 일련의 조치가 있은 후, 1790년(정조 14) 7월 13일에는 다대포첨사(多大浦僉使)로 나가는 임태원(林泰遠)을 불러 “달천서원(達川書院)이 이미 역사를 마쳤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기쁘다. 지금 행로가 달천을 지나는가?”라고 묻는다. 그간에 서원 수리가 모두 끝났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달천서원>으로 반복해 부르고 있다.

 

정조는 1778년에도, 1790년에도 <달천서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애초에 충렬사를 시작으로 사액된 서원의 이름이 달천서원이 아니었을까 의심된다. 그러나 <달천서원>이라는 언급은 정조에게서 밖에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충렬서원(忠烈書院)>도 현재로서는 1914년에 측량 제작된 지적원도와 그것을 정리한 <토지조사부>에서 밖에 확인되지 않는다. 서원이 존재했지만 그 명칭도 혼선을 빚게 한다.

 

인격에 대한 예우, 공간에 대한 정비, 제사 유지를 위한 전토의 교부, 공간 관리를 위한 지방관에 대한 명령, 그 후손의 생계를 위한 관직 제수 등의 조치는 치밀하고 파격적이다. 그러나 정조의 임경업에 대한 조치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전 충청 감사 정존중이 아뢰기를,

 

“충주에 있는 충민공의 사당 뜰에 세울 비석의 글을 상께서 친히 지으시고 친히 쓰시려는 뜻은 백세토록 백성들을 감화하기에 충분하니 글자의 점 하나 획 하나라도 실제와 다르게 새겨진다면 얼마나 온당치 못한 일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비석은 충주 목사로 하여금 떠 납부하게(浮納) 하고 비석 글자의 북칠(北漆:돌에 글자를 새길 때에, 글씨를 쓴 종이 거죽에 밀칠을 하고 그 뒤쪽에 비치는 글자의 테두리를 그린 후 돌에 붙이고 자꾸 문질러서 글씨 자국이 나도록 하는 일)은 연기 현감 황운조(黃運祚)로 하여금 사자관(寫字官)과 함께 거행하게 하는 것이 사의에 맞다고 봅니다.”

 

하여, 그대로 따랐다. (『일성록』, 정조 15년 신해(1791) 1월 28일자 13번 기사)

 

단월 충렬사에 가면 볼 수 있는 <어제달천충렬사비(御製達川忠烈祠碑)>와 관계된 일이다. 전년도에 취한 각종 조치에 후속하는 일이다. 1월에 논의하여 결정된 일로 정조가 직접 비문을 지었다. 6개월 뒤에 그 결과가 확인된다.

 

전교하기를,

 

“오늘 신종황제(神宗皇帝)의 봉실(奉室)에 망배(望拜)하였는데, 유명 총병관(有明摠兵官)으로서 대명(大明)에 대절(大節)를 갖추고 대의(大義)를 떨친 사람을 그동안의 역사에서 찾아보면 어찌 절의가 임 충민공(林忠愍公)만 한 이가 있겠는가. 오늘 일어난 감회를 등한히 보아 넘길 수 없으니 만들어 둔 어제 비명을 내각으로 하여금 오늘 충청 감사에게 내려보내게 하고 전에 내린 유지(有旨)대로 추수하기를 기다려 즉시 역사를 시작한 뒤에 인본(印本)을 올려보내라고 내각으로 하여금 하유하게 하라. 그리고 가지고 갈 때는 농사철에 민읍(民邑)에서 주전(廚傳)하는 폐해를 염려해야 하니 기읍(畿邑)은 찰방이, 호서는 각기 연로(沿路)의 수령이 차차로 받들고 가서 도신에게 전하도록 분부하라.” (『일성록』, 정조 15년 신해(1791) 7월 21일자, 7번 기사)

 

정조가 취한 아홉 번째 조치는 임경업을 위한 비문을 짓고, 비석을 세운 일이다.

 

곧이어 행한 열 번째 조치는 임경업이 행한 일을 모두가 자세히 알게끔 하기 위해 《임경업실기》를 편찬토록 한 것이다.

 

상이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과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의 사실에 감동하여, 각신(閣臣) 김희(金熹)에게는 《임경업실기(林慶業實紀)》를 편집하게 하고, 서용보(徐龍輔)에게는 《김덕령유사(金德齡遺事)》를 편집하게 하였다. 책이 이루어지자 어제로 서문을 지어 주고, 호남의 도신에게 간행하도록 명하였다. (『정조실록』, 정조 15년 신해(1791) 4월 26일자, 3번 기사)

 

정조는 <임충민공실기(林忠愍公實記)>를 간행한 이유를 그의 문집인 『홍재전서』에서 밝혀 놓았다.

 

“내가 즉위한 초기에 다시 유사(有司)에게 지시하여 사당을 수리하였고, 무신년(1788, 정조12)에는 또다시 장군의 유상(遺像)을 그려서 사당에 안치하고, 정문(旌門)을 세워서 장군이 살던 마을임을 표시하고,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내리고, 공덕을 새긴 비명(碑銘)을 지어 세우기까지 하였으니, 이 정도면 옛날에 이른바 공적을 위로하고 충성에 보답하기 위하여 행하는 의례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얼마 후 또 생각해 보니 장군의 충의(忠義)와 명절(名節)은 여인네나 아이들까지도 다 말할 정도로 알려져 있으니 진실로 크게 선양(宣揚)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전기(傳記)를 다룬 책이 없으면 어떻게 후세에 전해서 훗날에 장군의 사적을 징험해 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각신(閣臣) 윤행임(尹行恁)에게 지시하여 유문(遺文)과 연보 및 후인이 지은 글들을 모아서 5권으로 편집하고 다시 내가 지은 비문(碑文)과 제문을 큰 글씨로 써서 책머리에 싣고 정유자(丁酉字)로 인쇄하여 반포하도록 하였다.” (정조, 『홍재전서』 제184권, 군서표기(羣書標記) 6, 명찬(命撰) 2)

 

앞서 행한 일련의 일들을 언급하고 마지막으로 실기를 편찬한 이유와 목적을 분명하게 밝혔다. 특히 임경업의 사적을 징험할 전기(傳記)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 의도로 우암 송시열의 <임장군경업전(林將軍慶業傳)>을 기준처럼 앞세웠다. (관련 글로, 허원기, 「악비(岳飛)와 임경업(林慶業)의 인물형상」, 『정신문화연구』 제41권 제3호(통권 152호), 2018. pp.245~274. 참고)

 

숙종, 영조, 정조를 거치며 만들어진 영웅의 형상화는 실기를 정점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충렬서원의 실체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만들어진 <지적원도>와 <토지조사부>에서 확인된다. 단월 지역에 총 13필지 7,508평이 확인된다. 전(田) 7필지 4,713평, 답(沓) 3필지 781평, 대지(垈地) 2필지 1,240평, 사사지(社寺地) 1필지 774평이다. 사사지는 충렬사를 포함한 공간이다. 토지의 소유주가 ‘충렬서원(忠烈書院)’으로 기록됨으로써 충렬서원의 존재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충렬서원 출신의 인물이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름만 서원이었는지, 실제 서원으로 기능했었는지는 추가로 확인해야 할 부분이다.

 

끝으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선조 20)~1671(현종 12)]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和哀林慶業(화애임경업) 임경업을 애도한 시에 화운하다

 

權謀小勇君奚取(권모소용군해취) 권모의 작은 용기를 그대 어찌 취하여

 

終是千秋二國臣(종시천추이국신) 천추에 두 나라 신하가 되고 말았는가

 

讞獄人言因冢宰(얼옥인언인총재) 총재가 얼옥한 탓이라 사람들은 말하지만

 

議誅誰識自天神(의주수식자천신) 하늘이 죽이려 의논했는지 어찌 알리오

 

雖云骨大張虛礮(수운골대장허포) 골대가 공갈을 치며 을러댔다고 하더라도

 

難贖皮營燒武囷(난속피영소무균) 피영의 무기고 불태운 건 용서받기 어렵도다

 

事似杜郵提劍日(사사두우제검일) 두우에서 칼을 든 일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未知還復仰蒼旻(미지환부앙창민) 하늘을 우러러 괜찮을지 그것은 모르겠네

 

고산(孤山)의 붓끝은 우암(尤庵)을 향해있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겨누어져 있는 것 같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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