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새재 관문이 있는 곳은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上草里) 지역이다. 시내버스를 타고 문경 새재 주차장에서 내리면 즐비한 음식점이 손님을 맞으며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그곳을 지나면 <옛길박물관>이 눈에 띈다. 잠시 들러서 옛길에 관한 일반 상식을 얻고 관람해도 괜찮다. 그러나 차편에 맞춘 시간 계산은 해야 한다.
왼쪽으로 개울을 끼고 계속 걷다보면 문경새재 1관문이 나온다. 두 팔을 활짝 벌려 격하게 환영하는 모양이다. 왼쪽 개울과 오른쪽 도랑에 수문이 보인다. 두 개의 수문을 눈여겨 봐둘 이유가 있다.
송계계곡에도 남문과 북문이라고 하여 골짜기를 막은 형태의 성문과 일부 성벽을 복원해 놓았다. 성벽을 계곡까지 이어놓지 않은 송계계곡의 경우 계곡이 흐르는 물길 부분을 어떻게 막음했을까? 또한 충주에는 외성(外城)이 있었다. 외성의 흐름을 물길이 막는 경우가 두 곳이었다. 하나는 남쪽의 시작인 범바위에서 개울을 건너는 곳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현천[염해천(鹽海川)]과 충주천[사천(泗川)]이 만나서 흐르는 대봉교 아래 부분이다. 항상 물이 그득했던 것이 아니므로 어떠한 형태로든 성벽 관련 시설을 하였을 것이다. 그것을 문경 새재 1관문의 좌우에 있는 수문을 통해 상상할 수 있다.
1관문 앞에 선다. 성문 위에는 묵직한 누각이 있다. 성을 향해 다가오는 적을 살핀다는 의미로 적루(敵樓)라고도 한다. 그 누각의 이마에는 ‘주흘관(主屹關)’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主屹山)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다. 성문을 지나 뒤돌아보면 누각 이마에 또 하나의 현판이 걸려 있다.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라고 하여 밖의 현판보다 더 육중해 보이기도 한다.
양쪽 현판에는 무심코 지나면 알아채지 못할 의미가 숨겨져 있다. 1927년에 이곳을 지나며 양쪽 현판을 보고 기록한 안재홍(安在鴻) 선생은, 밖은 ‘주흘문(主屹門)’이요, 안은 ‘진남제일관(鎭南第一關)’으로 현판에 쓴 글자를 적어 놓았다.
100여년 남짓한 옛 기록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안팤이 모두 다르다. 주흘관이냐 주흘문이냐, 아니면 영남제일관이냐 진남제일관이냐? 본래는 주흘문과 진남제일관이라고 하였던 것이 지금은 주흘관과 영남제일관으로 바뀐 것이 아닐까?
성 안에 주인이 있고, 적이든 객이든 성문 앞에 도착하면 성문의 이름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예이며 기본이었다. 이름을 알고 성문을 지나면 그 성문의 기능과 의미를 담은 또다른 이름의 현판이 걸린 경우가 많다.
지금은 관문(關門)에 주목하여 안팤의 이름을 모두 관(關)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문경 새재에 닿기 전에 문경시 고모면에 고모산성(姑母山城)이 있고 그곳의 문루에 진남문(鎭南門)이라는 현판이 있어서 1관문이 본래 진남제일관이었다고 하면 문경 사람이 먼저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진남(鎭南)의 개념은 문경을 중심으로 붙인 것이 아니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또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밀려오는 왜군을 대적하지 못하고 후퇴했던 기억에서 한양 방어 전략을 새로 짜며 관문 개념이 생긴 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진남은 서울에서 보았을 때에 성립되는 개념이지 문경이나 영남을 중심에 놓고 보면 성림되지 않는 개념이다. 더구나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조선 최고의 장수라고 하던 신립(申砬)을 충주로 급히 보냈으나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패했던 것을 두고, ‘조령을 막았더라면?’ ‘조령을 두고 충주에서 배수진을 치다니?’와 같은 뒷얘기가 많다. 그것을 거울삼아 조령에 삼중 방어선을 강화하고 생긴 결과가 실질적인 관문(關門) 개념이다. 그래서 서울의 남쪽을 막아내는 첫 관문이라는 의미로 ‘진남제일관’이 되었고 순서대로 제이, 제삼 관문이 성립되었다.
주흘관과 영남제일관이라고 걸린 현판에 물음표를 던지며 걷기 시작한다면 꼭대기 3관문까지 생각할 꺼리가 하나 생긴다. 그것을 뒤로 하고 성벽 동쪽 끝에 있는 성황당에 잠시 들른다. 거기에는 병자호란과 관련된 전설이 하나 있다.
조령의 성황당은 여신을 모신다고 한다. 그 성황당 여신이 예쁜 여자로 변신해 한양으로 향하며 조령 산길을 걷던 젊은 최명길(崔鳴吉, 1586 ~ 1647)과 동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장차 나라에 큰 변란이 닥칠 때 청나라와 화친하여 나라를 보전하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몇 년 전에 개봉했던 영화 <남한산성>을 떠올리게 한다. 병자호란(1636)을 맞아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과 척화를 주장하는 김상헌(金尙憲, 1570 ~ 1652)의 극적 대립이 영화 내내 계속된다. 그때 최명길의 주장이 이곳 성황당 여신의 예견에 기초한 것이었다면 어쩌면 허망한 일일지도 모른다.
문경 새재는 전체가 국가 명승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만큼 경치도 빼어나지만 역사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픈 이야기도 많다. 나는 특히 1592년 6월 7일을 생각한다. 그날은 음력으로 4월 28일이었다. 6월 4일에 상주를 함락한 왜군 1번대는 전날인 6월 6일에 문경에서 하룻밤을 잤다. 그때 종군했던 대마도 묘심사(妙心寺)의 중이었던 천형(天荊)의 기록인 『서정일기(西征日記)』에서 확인된다.
* 26일(廿六日, 조선력 27일, 양력 6월 6일), 맑음(晴) 새벽 4시쯤 상주의 숙소를 출발해 정오쯤에 함창을 지났고, 오후 6시쯤 문경에 도착했다. 문경의 성은 스스로 불지르고 도망쳤다. (寅刻發尙州宿處 午刻過咸尙[昌] 酉刻到聞慶 聞慶之城自放火而亡)
* 27일(廿七日, 조선력 28일, 양력 6월 7일), 맑음(晴) 새벽 4시쯤 문경을 출발해 아침 8시쯤 안보를 지나 정오쯤에 충주에 이르렀다. 서울에서 온 장군이 수만 병력을 인솔하여 부의 북쪽 반리[5리]의 송산(松山, 탄금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군사들은 깃발을 들고 말을 몰아 송산의 진을 향하니 패하여 도망쳤다. 대주와 섭주의 병사가 북쪽으로 뒤쫓았다. 목을 벤 머리가 3천여 급이고 포로가 수백인이었다. 대장 신입석은 죽었다. 혹은 신립이라고 쓴다. 먼저 오른 이는 대주였다. 이날 밤 태수는 성에서 5정 거리에 진을 쳤고, 나는 성안에 있다. (寅刻發聞慶 而辰刻過安保 午刻達忠州 自洛將軍來 而率數萬之兵 府之北半里計陳松山 官軍擧旌旗 馳馬向松山之陳敗走 對州攝州之兵逐北 刎首三千餘級 虜數百人 大將申立石死 或作申砬 先登者對州也 此夜 太守去城五町許而陣 余在城中)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끌었던 왜군 1번대의 병력은 18,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문경 새재를 걷다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길을 한날 한시에 가장 많은 인원이 걸어 넘은 것은 1592년 6월 7일 아침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곧 충주의 운명을 갈라놓았고, 선조의 몽진을 결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살 떨리는 살벌한 광경이지만 조령 천험(天險)을 아무런 대항도 없이 넘을 수 있었다는 것이 현장에 없었던 나로서는 여전히 수긍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제 1관문을 지나 산길을 걸어 올라간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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