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충주시와 수자원공사간에 물값 전쟁이 재점화되나 보다. 그 충주댐이 들어서기 전에 벌써 설계단계에 있던 원조 충주수력발전소가 있었다. 오늘은 그 얘기를 되짚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왜 중단됐는가? 답은 간단하다. 돈이 없어서.
그럼, 왜 만들려고 했지? 그것도 간단하다. 갑자기 전력이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1948년 5월 10일, 소위 ‘5ㆍ10 남한총선거’가 실시됐다. 외형상 38선이 땅에 그어진 남북분단의 시작이라면, 5ㆍ10 총선거는 사실상 정치적 분단의 종지부를 찍은 일이다. 그리고 5월 14일 정오를 기해 북에서 내려오던 전기, 즉 송전중단(送電中斷) 조치가 시행됐다. 경제적 분단이 단행된 것이다. 남한 총소비전력의 80%를 공급받던 상황에서 갑자기 암흑세계가 된 것이다. 다시 6.25라 불리는 동족상잔의 비극은 결국 민족분단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쟁에 의해 파괴된 시설은 쉽게 복구되지 못했다. 자체적인 재원도 부족한 상황에서 원조에 의한 수혈을 받으며 조금씩 일어나려 했다. 국가적인 전후복구, 경제부흥을 위한 움직임에서 충주가 선택된 대형 사건이 비료공장 설치 결정이었다. 1954년의 일이다. 이 결정에 따른 충주의 청사진은 이렇게 제시되어 있다.
<공장지대로 변모할 충주지방> 120만 수용의 대도시화, 비료공장, 수전 설치, 철도 연장도 실현 【충주에서 본사 윤달현(尹達鉉) 특전 2신】 10일 하오 5시 40분에 항공편(헤리곱타)으로 충주교현국민학교정에 착륙한 상공ㆍ교통ㆍ기획 3부처 차관과 미 최고정책고문관은 본 정(鄭樂勳) 지사, 김(金永厦) 산업국장을 비롯하여 충주에 있는 각 기관장들의 안내로서 약 6키로 떨어져 있는 충주읍 목행리의 비료공장 건축 계획 기지를 답사하고 한강 상류인 동량면 조동리 수력발전소 설치 예정지를 답사하였는데 요소요소에서 상공부 김(金文輝) 화학과장이 설명하는 바에 의하면 공장 또는 발전(發電) 상으로 유리한 조건과 공사가 용이하고 간편하다는 점 등을 3부처 차관과 미 최고경제고문관에게 보고해 그들 조사단원들은 각각 만족한 표정을 표시하고 있었다.
한편 비료공장과 수력발전소에 따르는 제반 문제 등에 대하여 동 조사단원들이 시사하는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비료공장 = 54년도 예산으로 운크라에서 3백만불, 그리고 FOA에서 2천만불의 예산이 편성되어 추진하고 있는데 대지(貸地) 40만평에 대하여 3년간의 계획으로 공사를 완료하는 날에는 초안(硝安) 비료 12만톤, 유안(硫安)으로 환산하면 20만톤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 수력발전 = 57년도까지에 전국에 발전소 4개소를 증설하고 30만키로를 발전할 계획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바, 본도에서는 충주에 5만 6천키로, 그리고 단양에 6만키로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 충주 발전소의 계획은 땜 수면(水面) 높이 61.8메타, 넓이 408메타로 중력식(重力式) 콩크리트로서 준공하면 40만 립방메타의 수량으로 최고 5만 6천키로, 평균 4만키로의 발전을 할 수 있다고 하며, 준공함에는 3년을 요하게 된다고 한다.
한편 동 지역이 타 지방에 비하여 유리한 조건은 공사비가 적게 들며 짧은 시일에 건축을 할 수 있고 또한 지질이 양호하며 제반 자료가 풍부하여 최소의 노력으로서 최대의 발전량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라고 한다.
◀ 철도연장 = 충북선을 제천으로 연장하고 영월탄광까지를 연결시키여 차량을 증배(增配)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하며,
◀ 도시계획 = 공장지대로 변함에 따라서 1백 20만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대도시계획을 수립하고 장차 그 계획에 의하여 추진할 것을 강구 중에 있다 한다. …(후략)… (충북신보. 1954. 5. 14. 2면 1단)
비료공장ㆍ수력발전ㆍ철도연장의 3종 선물세트에 의해 계획했던 충주는 인구 120만명의 대도시였다. 어떤 근거에서 그러한 계획을 세우고자 했는지, 여전히 모를 일이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충주비료공장 건설이 전체적인 사업을 견인했다. 건설자재 수송 등을 이유로 충북선의 목행까지 연장선로 공사가 우선 이루어졌고, 동시에 비료공장에서 사용할 전기 생산을 위한 충주수력발전소 건설 계획이 착착 진행돼 가는 듯했다. 아니, 계획상으로는 매년 조금씩이지만 근 10년 가까이 단골 메뉴로 꾸준히 거론되며 곧 착공할 것 같은 청사진은 계속 펼쳐졌었다.
1954년의 건설 계획에 의해 입지조사가 시작됐고, 1955년 2월 8일에는 댐건설에 따른 수몰지 대책이 전원(電源)개발위원회에서 논의되었다. 총 수몰면적 6,266정보(밭 2,100정보, 논 833정보, 임야 및 잡초지 1,355정보, 하천 1,966정보), 가옥 2,400호라고 했다. 56년에는 발전용량이 당초 56,000㎾에서 75,000㎾로 상향조정되었다. 이런 중에 1957년 2월 28일, 괴산소수력발전소가 5년 공사기간(1952년 11월 착공)을 거쳐 준공식을 하기도 했다.(발전량 2,180㎾)
58년이 지나고 59년이 지나고, 다시 60년이 되어서 정권이 무너지고, 61년에는 군사쿠테타로 정국이 여전히 불안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그런 중에도 충주수력발전소 건설 계획은 5개년 계획의 핵심 중의 하나로 꾸준히 논의ㆍ추진되었다. 그리고 계획만 남고 첫삽을 뜨지 못한 채 사라졌다.
‘왜?’라는 질문을 다시 한다. 국내적인 상황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당시의 국내 경제 상황에서 자체적인 자금 조달을 통한 투자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할까? 원조자금이라고 하는 것이 미국의 자금으로 보면 된다. 지원해 주기로 했던 미국이 갑자기 몫돈을 쓸 일이 생겼다. 바로 월남전 개입이다. 얼마나 들어갈지 모르는 전쟁비용을 놓고 고민할 때에 혈맹이며 우방국이라고 하는 후진국 남한의 상황은 둘째 문제였다.
보릿고개도 넘기기 힘든 삶의 질을 개선해 보겠다는 목표를 두었지만, 그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그래서 결국 달라($)를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일협정을 통한 돈을 받았고, 월남 파병을 통한 핏값을 벌었다. 이어진 악순환은 독일로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는 달라벌이로 이어졌다.
그렇게 계획됐던 충주수력발전소는 충주다목적댐이라는 이름으로 1980년대에 정권이 바뀐 후의 충주에 준 대규모 국책사업으로 들어서게 됐다. 물이 막히고 근 40년 된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120만 도시가 됐는가? 그렇다고 자체적인 동력이 충분한가?
미국 원조, 차관 얻어온다는 큰정치와 국비 따온다고, 가져온다고 하는 큰정치가 별다를 바 없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70년대 산업엔진으로 불야성을 이루던 충주비료공장의 잉여는 어디로 갔는가 생각해보면, 보릿고개 넘기겠다고 필리핀 땡볕에서 수백 수천번의 교배 실험을 통해 통일벼를 개발한 충주 사람 허문회(許文會) 선생님의 노력이 기억되지 않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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