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일제강점기 충주를 얘기 한 책, 4권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09 [18:29]

118. 일제강점기 충주를 얘기 한 책, 4권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09/09 [18:29]

 

네 권의 책이 있다.

 

① 최근의 충주(最近之忠州, 1915) ② 충주발전지(忠州發展誌, 1916) ③ 충주관찰지(忠州觀察誌, 1931) ④ 충주발전사(忠州發展史, 1933) 등이 그것이다. 나는 이 네 권의 책을 일제강점기 충주 4대기서라고 얘기한다. 이 네 권의 책은 일제강점기 충주를 기록한 것인 동시에, 그것을 볼 때는 항상 합리적인 의심을 하면서 글자 하나까지도 다시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이유에서 네 권의 책을 소개한다.

 

1. 최근의 충주(最近之忠州, 1915)

 

『최근의 충주』는 충주에 있던 일본인 촌상우차랑(村上友次郞)이 저자 겸 발행자로 1915년 6월 25일자로 발행된 책이다. 저자에 대한 사항은 아직 자료 접근을 못하고 있다. 이 책의 전체적인 성격은 저자 서문과 거기에 부합하는 충주 지역의 농업 여건 분석을 통해 알 수 있다.

 

① …(전략)… 일ㆍ한합병 이후로 우리 당국에서는 길도 고치고 혹은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을 권장하는 등 정성을 다해 백성들의 정신적 안정을 꾀하는 한편, 여러 가지 시설공사도 계획성 있게 추진되어 그 성과가 뚜렷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황색 엽연초 같은 것은 그 성적이 매우 뛰어나서 충북 유일의 생산물로 자리잡았고 그 외에 다른 농산물도 기대되는 종목이 적지 않다.

 

이에 즈음하여, 잇달아 이주해 오는 내지인이 날로 늘어나 어리석고 둔한 조선인을 잘 이끌어감으로써 살림을 잘 다스리는 본보기를 보이고 또한 몸소 실천하는 아름다운 풍속을 장려하니, 그로 인하여 서로 융화동화하여 살아가게 되는 효과를 거둠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땅속에 묻힌 광산물을 개발하고, 벌거숭이산이 울창한 숲으로 변하며, 모든 관리들이 제자리를 찾는 등 점점 활기를 띠고 있다. 이것이 요즘의 충주 모습이다.

 

나는 이 발전하는 충주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관계 당국과 능력있는 민간인들에게 자료를 맡기고 혹은 부탁하였는데 이제야 간신히 책으로 내게 되었다. …(후략)…

 

② △ 농업에 유리한 편의로 인식되는 사항

 

1) 토지의 가격이 싸다. / 2) 경지를 구매하기 쉽다. / 3) 토지에 대한 세금 등의 부담이 적다. / 4) 보리농사를 비롯한 농작물의 피해가 적다. / 5) 현재의 유치한 농사법을 개량, 앞으로 수확량을 늘릴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 6) 도처에 가축의 이용이 쉽다. / 7) 공기가 건조해서 습기의 염려가 없기 때문에 양잠이나 저견(貯繭)이 용이하고 고치의 해서(解舒) 작업이 잘 되며 뽕밭에 늦서리 피해가 적다. / 8) 이주자가 늘어남에 따라 채소와 과일의 수요ㆍ이익이 많고 또 풍토 관계상 가지치기 작업에 크게 주의하지 않아도 결실이 잘 된다. / 9) 살미면, 동량면, 읍내면, 금가면, 가금면, 엄정면, 앙성면, 즉 한강 연안 평야에는 겨울철에 보리, 그리고 여름철에 수수를 재배하며, 간작으로 뽕나무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땅이 많다.

 

△ 불편하다고 인식되는 사항

 

1) 관개시설이 부족하다. / 2) 지적(地積)의 명칭과 그 넓이가 일정치 않아 구매에 곤란하다. / 3) 비료, 농구(農具), 묘목 등의 구입이 불편하다. / 4) 농구의 수선이 불편하다.

 

①의 인용은 저자의 서언으로 ‘잇달아 이주해 오는 내지인(일본인)이 날로 늘어나 어리석고 둔한 조선인을 잘 이끌어감으로써’처럼 저술 목적은 충주로 이주해 오는 일본인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발전하는 충주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즉, 충주를 잘 알지 못하는 일본인 이주자들에게 알리기 위한 목적 역시 기술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식민지화된 조선, 그리고 충청북도 충주로 이주해오는 일본인의 이주 정착 안내서의 성격이 짙다.

 

②의 인용은 농업을 개괄하는 장의 첫머리로 충주지역의 농업 상황에 대한 장단점을 구체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서언에서 말한 ‘어리석고 둔한 조선인’이 사는 충주는 여러 면에서 농사짓기에 편리하다. 불편한 점 역시 개선해가면 더욱 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장점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투자 대상이 되기에 적절한 곳으로 해석될 수 있다.

 

각 분야별 현황을 예시한 통계 자료는 보통 대정(大正) 3년(1914)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소가죽은 1915년 3월, 재정은 1915년 1월, 저축예금은 1915년 5월 20일 현재, 노임은 1915년 4월 조사, 공립농업학교 설치는 1915년 4월, 자위조합 조직은 1915년 4월 1일자로 기록하고 있다. 즉, 이 책은 1914년을 기준 시점으로 전체적인 현황 조사를 하되, 1915년 6월 25일 발행 직전 상황에서 새롭게 조직되거나 만들어진 기구에 대한 반영 및 정확성을 요구하는 물가나 노임, 예금 사항 등은 최대한 그 시점을 현재에 맞추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1915년 상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책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식민지화 초기 과정에서 충주의 변화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1912년부터 시작된 <충주시구개정(忠州市區改正)>에 관한 사항은 언급이 없다. 이것은 후속해서 발행된 1916년의 『충주발전지(忠州發展誌)』의 기본 골격으로 자리한다. 두 책이 비슷한 시기에 기획되면서 철저하게 역할 분담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최근의 충주』는 식민지화된 충주로 이주해오는 일본인의 정착을 돕기 위한 안내서로서 기본 자료에 충실했다면, 『충주발전지』는 <충주시구개정>을 통해 도시구조 자체를 일본화해 낸 상황에서 어떻게 경영 내지 지배할 것인가에 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충주발전지(忠州發展誌, 1916)

 

『충주발전지』는 경성일보(京城日報) 충주지국을 운영하던 일본인 금곡아성(金谷雅城)에 의해 1916년10월 30일자로 발행된 책이다. 저자에 대한 사항은 당시 경성일보 충주지국장 또는 주임 또는 신문기자로 있으면서 내외도서ㆍ신문ㆍ잡지 및 문방구, 그림엽서, 액자 등을 판매하던 외에 자세한 것은 아직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의 핵심은 1912년 9월 12일에 시작해 1915년 9월에 마쳤다는 <충주시구개정(忠州市區改正)>에 있다.

 

③ …(전략)… 본서는 시구개정(市區改正) 준공을 기념하여 충주군의 명승구적을 수록하고, 일한합방 이후 일본인의 발전 상황을 널리 사회에 소개하려는데 있어서 이것을 통해 조금이나마 공헌하고자 하는 작은 뜻으로 제목을 정하여 『충주발전지』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후략)…

 

④ …(전략)… 끝으로 독자 제현에게 대단히 죄송한 것은 본지 발행이 늦어졌다는 것입니다. 7월 초순에 발행되었어야 할 것을 사진촬영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예정보다 늦어지게 된 것을 저자의 부끄러움으로 알고 독자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③의 인용에 보이듯 ‘시구개정 준공을 기념하여’라는 뚜렷한 기획의도를 <서문>에 밝히고 있다. 표지를 충주를 중심에 놓은 도로망 지도로 디자인하였다. 경부선 철도를 통해 청주를 거쳐 충주에 다다르는 지도를 먼저 준 점은 의도된 목적이 무엇인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1/6,000 축적의 <충주시구개정도>를 앞에 배치하고 그 사업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일본식 도시로 변형을 해낸 결과를 결국 ‘일한합방 이후 일본인의 발전 상황을 널리 사회에 소개하려는’ 목적에 충실하고 있다.

 

④의 인용에 보이는 변명처럼 덧붙인 <보유>에서 당초 7월 초순 발행 예정이던 일정이 10월 말로 미뤄진 이유를 사진촬영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상대적으로 1916년 당시의 사진 자료가 많이 수록되어 있어서 3년간의 시구개정을 통해 일본인 방식으로 재구성되어 가는, 즉 파괴되어 가던 충주 상황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자료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최근의 충주』와 함께 놓고 볼 때, 1916년 중반까지 충주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점에서 우선적으로 면밀히 검토되어야 할 자료다. 이 책에서 기획된 편집 방식은 1930년대에 발행한 서적에서도 답습하고 있어서, 내용뿐만 아니라 사진상으로 15년간의 변화를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3. 충주관찰지(忠州觀察誌, 1931)

 

『충주관찰지』는 일본인 오토거천외(奧土居天外)에 의해 1930년 집필되었고, 1931년 12월 10일자로 발행된 책이다. 저자 오토거천외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혀진 바 없다. 몇 가지 흔적을 찾으면, 남선일보(南鮮日報) 이사였고, 충주번영회(忠州繁榮會) 부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충주읍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1표 차로 낙선되기도 했던 이력이 확인된다. 또한 집필 당시(1930) ‘내가 충주 땅에 살기로 결정한지 벌써 13년째 접어들어 9번의 성상 동안 언제나 충주의 발전을 빌었지만…’을 보면 1918년 경에 충주 이주를 결정했고, 1921년 경에 이주해온 인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는 1931년 당시에 오토거고금당(奧土居古今堂)이라는 골동상을 운영하며, 부산일보사 충주지국을 맡고 있었다.

 

이 책은 1928년 충북선이 충주까지 연장 개통된 이후에 ‘대충주(大忠州) 건설’이라는 발전을 꾀하기 위해 각 기관 단체 등의 역량을 최대한 모아 종합하였다. 그래서 농업을 위시한 각 산업 분야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발행되었다.

 

⑤ …(전략)… 본서는 우리 충주를 알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간절함과 충주 땅의 근본과 현황을 기록한 『충주관찰지』라고 제목을 달았다.

 

⑥ …(전략)… 1908년 6월 5일에 관찰도청을 청주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 당시 지방에서의 불편한 일은 도청 금고를 수송하는데 수십 명을 부역으로 끌어내어 부락별로 보냈는데, 10여 일만에 청주에 돌아올 수 있었던 상태여서 오늘날 상상하면 실로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다. …(중략)… 지방의 농산상공업(農産商工業)은 총독부의 커다란 방침에 따라 도청 및 군ㆍ면 당국의 지도와 일반인들의 자각된 노력으로 현저하게 진보 발전하였고, 도로의 개수, 철도의 개통과 순차적으로 교통의 편리함을 얻게 되어 오늘날에는 도청의 금고 따위는 하루에 1,000개의 수송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발전하였지만 우리는 현재에 결코 만족할 수는 없다. …(후략)…

 

⑦ …(전략)… 제2의 충주의 건설 사업으로 매년 인구증가에 따른 시가지 확장공사는 목전에 떨어진 일이다. 충주역과 대수정 사이의 1등도로 확장과 시장 부근 교현리, 용산리, 호암리 일부에 대한 시가지의 개수계획도 있다. 상수도 설치, 하수구 완성, 도시금융조합의 설치, 창고업의 창립 등과 기타 문화시설을 한꺼번에 갖추는 일은 쉽지 않으나 오늘의 충주는 기초건축의 시대로 하고 이들의 현안을 순차적으로 완성해 나가는 가운데 조선인과 일본인이 융화하고 관민이 일치하여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모든 것을 연구하고 노력하여 자타가 영원한 복리증진을 도모하는데 유감이 없기를 열망하며, 졸필로 일대 각성을 촉구하고자 하니 모든 사람들의 양해가 있기를 바란다.

 

⑤의 인용에서 주목되는 것은 ‘우리 충주(吾が忠州)’라고 규정한 점이다. 1905년을 기준으로 하면 25년, 1910년을 기준으로 하면 20년이 지난 식민지 고착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조선 동포를 일으켜 세우면서, 조선화(朝鮮化) 되어 가는 사람이 많은 것은 놀라운 현상이다. 이에 일대 각성을 촉구하는 바이다’라며 충주에 정착한 일본인들의 정체성 상실을 견제하고 있다. 결국 일본인의 충주 건설을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방향을 설정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⑥의 인용에서 보면 1908년 도청의 청주 이전 상황과 비교하며, 1928년에 연장 개통된 충북선의 기능이 충주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⑦에서는 여건 변화를 최대한 이용해 ‘제2의 충주 건설’을 행하고, 결국 ‘자타가 영원한 복리증진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나가자고 역설한다. 누가 주인인가 하는 문제는 새삼 논할 필요가 없다. 완전한 식민도시 충주에 사는 일본인의 관점으로 그 기득권을 굳히기 위한 목적에서 책을 기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 충주발전사(忠州發展史, 1933)

 

『충주발전사』는 조선인 이영(李英)에 의해 1933년 10월 1일자로 발행된 책이다. 저자 이영은 당시에 매일신보 충주지국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발행면에 저작 겸 발행자는 이봉근(李奉根)으로 적혀 있다. 물론 표지면에는 이영 저(著)라고 해놓아 혼란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봉근은 본명이고, 이영이라는 이름은 1931년 2월부터 확인된다. 동일인임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책 본문 중에 있다. 즉 ‘단양은 기자가 교직 1년의 생활을 시작했던 제2의 고향이다’라는 대목이다. 충주 관련 신문자료를 정리하며 이봉근이라는 이름이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1925년 7월 17에 발생한 사건으로 그 기사에 이봉근(李奉根)이 등장한다.

 

⑧ …(전략)… 종열은 이 놈이 사람 친다는 구실로 순봉을 상대로 그날 밤에 곧 당지 경찰서에다가 상해죄로 고소를 제기하고 일방으로 종열의 아들(정녀 소생) 현금 단양공보교 훈도인 이봉근(李奉根)에게 사건을 처리하라는 의미로 전화로 호출하여 봉근 오기를 고대 중이더니 …(후략)…

 

일종의 패륜 사건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이 훈도가 바로 이봉근이고, 그가 곧 이 책의 저자 이영이었다. 이봉근을 역추적하니 그는 1920년 3월 20일자에 현 충주교현초등학교 제12회 졸업생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1925년 3월 17일에 청주공립사범학교 특과생 29명의 졸업생 중 한 사람으로 확인된다. 졸업과 동시에 단양공보 훈도로 초임 발령을 받았다. 이 시기에 위의 패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 영향 때문인지 그는 1926년에는 옥천의 청산보통학교로 전보되었고, 이후에는 직원록에 자료가 없다. 아마도 교직을 떠난 것으로 생각되는데, 1925년 패륜 사건의 영향 때문으로 짐작해 본다. 그러다가 최소한 1931년부터 이영(李英)이란 이름으로 충주에 재등장하고 있으며, 1933년 10월 1일자로 이 책을 발행한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기자생활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앞의 세 책과 달리 개론(槪論)으로 <충주의 연혁>에 대한 서술이 상대적으로 길다. 그 중에 러일전쟁 이후부터 충주 변화상을 전체 분량의 2/3 이상을 할당하여 기술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충주 발전은 일제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기자의 기록 정신에 입각한 측면에서 보면 사실의 정확성을 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식민지 상황에서의 모순된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점은 이 책이 가지는 한계이다. 그러나 앞의 세 책과 달리 1930년대 초반에 활동하던 충주의 조선인이 상대적으로 많이 포괄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사실의 정확성을 기하려 했던 것에 기초하고 덧씌워진 해석과 평가를 걷어내며 읽는다면 1930년대 초반의 충주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참고자료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충주의 일제강점기를 접근할 때 중요한 책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바로 읽어야 할 폭탄이 요소요소에 많다. 잘 참고해 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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