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새재에서 수안보까지 - 4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18 [10:27]

작은 새재에서 수안보까지 - 4

김희찬 | 입력 : 2023/09/18 [10:27]

 

지금은 수안보온천으로 부르지만, 예전에는 ‘온정원(溫井院)’으로 기록되었고 ‘안부온정(溫井) 또는 온천(溫泉)’ㆍ‘연풍온정 또는 온천’으로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문경 새재를 넘으며 동화원(東華院)ㆍ조령원(鳥嶺院)ㆍ신혜원(新惠院)이 길을 따라 시설을 갖춘 원으로 길손들에게 편의를 제공했음을 보았다.

 

원(院)은 역과 역 사이에 한두 곳이 있었으며, 역(驛)ㆍ원(院)ㆍ점(店)의 순으로 규모를 달리했지만 모두 주요 교통로를 따라 존재하며 기능했었다. 여기에 참(站)이 있어서 급한 공문을 이어달리기하듯 파발(擺撥)을 놓았으며, 동시에 공무 출장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다. 땅길에 설치된 참을 발참(撥站)이라고 했고, 물길과 관련한 참을 수참(水站)이라고 하여 기능과 역할을 구분했었다.

 

현재의 수안보면에는 안부역이 있었고, 온정원이 있었다. 그리고 안보참과 수회참(水回站)이 있어서 연풍면의 신혜원과 더불어 연풍현 구간을 지나던 영남대로 상의 중요 교통 기관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마을의 주막, 즉 점(店)이 촘촘히 있어서 다양한 형태의 편의를 제공했었다.

 

그러나 수안보온천에 있었던 온정원은 일반적인 원의 기능 외에 온천이 있었기 때문에 치료를 목적으로 장기 요양을 왔던 고관대작은 물론 병자들의 이용이 많았다. 자료를 정리해 본 결과 조선시대에 수안보온천은 특히 다릿병에 특효가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그것이 오히려 현지 주민의 입장에서는 성가시고 불편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수안보온천은 과거 온정원과 관련된 수안보온천의 역사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을 문둥병 환자가 머물면서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로 대체하곤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일제에 의해 온천 관광지로 개발된 이후의 온천사(溫泉史)를 바탕에 깔고 이야기하고 있다.

 

온정원과 온천의 본래 위치를 지적원도를 통해 확인해 본 일이 있다. 1914년 3월 10일부터 4월 28일까지 진행된 온천리 지적원도 측량 결과에는 ‘온천리 211번지’가 대지(垈地)이고 국유지(國有地)였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온천에서 석문천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확인되어 온천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 지금은 지번이 분할되어 211-1번지부터 211-25번지까지 조각났지만, 단일 지번일 때의 상황에서 보면 온천을 중심으로 온정원이 규모가 컸던 원으로 자리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곧 역대 연풍현의 지지류에서 ‘온정원(溫井院)은 온정 곁에 있다.(溫井院 在溫井傍)’거나 ‘온천(溫泉)은 (연풍)현 북쪽 20리 안부역(安富驛) 서쪽에 있고, 9칸 집이 있다.(溫泉 在縣北二十里. 安富驛 西, 有屋九間.)’고 기록한 곳이다.

 

그러나 수안보면 자체에서 수안보온천의 역사를 기록한 『상모면지(上芼面誌)』(1994)나 그것의 개정판인 『수안보에 살으리랏다(수안보면지)』(2011)에서는 ‘이 온정원의 위치는 …(중략)… 수안보에서 출생하고 수안보에서 살고 있는 오용근ㆍ노윤택 씨의 증언에 따르면 석현(石峴, 일명 돌고개) 근방으로 추정된다. 이 돌고개에는 상당히 큰 느티나무와 예로부터 존속했다고 전해지는 두 채의 큰 주막이 있었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곳에서 쉬어가고 유숙했다고 하는데, 이 돌고개는 위치상 「여지도서」의 기록내용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온정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고, 대개의 원(院)이 주막의 형태를 취했으므로 이곳에 온정원이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라고 하여 돌고개 주막에 대한 이야기를 온정원에 대한 이야기로 억측하고 있다.

 

지금의 ‘수안보온천호텔’이라는 곳이 조선시대 초기부터 기록을 통해 이용 사실이 확인되는 온천이 있던 자리이고, 길 건너 남쪽에 211로 시작되는 지번 전체가 온정원이 있던 곳이다.

 

지금 수안보온천수의 온도를 53℃라고 홍보한다. 온천교 아래 석문천에서 굴착하여 새로 개발한 온천공에서 나오는 온천수의 온도이다. 본래의 온천은 말 그대로 샘[泉]으로 따뜻한 물이 사시사철 솟아나던 곳이었다. 그것의 수온을 처음 온도계로 잰 1908년, 경성위수병원(京城衛戍兵院)에 의뢰한 결과 41℃였다는 기록이 있다.(조선총독부 지질조사소, 『조선광상조사보고(朝鮮鑛床調査報告)』(제8권, 충청북도), <광천(鑛泉) - 충청북도 상모면 온천리 수안보온천>, 1923.)

 

경성위수병원은 1905년에 서울 용산을 중심으로 일본 주차군(駐箚軍)이 주둔하면서 설치된 일본군 병원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충주에 일본군을 파견하며 충주수비대(忠州守備隊)를 두었고, 충주수비대와 함께 경성위수병원 충주분원이 설치된 것이 1905년 10월이다. 11월 17일에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전 상황이다. 충주수비대에서는 수안보에 헌병분견대(憲兵分遣隊)를 파견하였고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를 설치였는데, 그들이 처음에 사용한 건물이 온천 옆에 있었던 온정원 건물이었다.

 

이후에 1921년 11월 5일에 측정한 수온은 45.5℃였고(조선총독부 지질조사소, 1923.), 1923년에는 40~50℃로 보도하고 있다.(매일신보, 1923년 3월 30일자.)그리고 1927년에는 수면온도가 43℃이고 온천공의 온도는 44.5℃라고 하였다.(타테이와 이와오(立岩巖), 「충청북도 괴산군 수안보온천 조사보문(調査報文)」, 『조선지질조사요보(朝鮮地質調査要報)』(제8권-1), 조선총독부 지질조사소, 1928.)

 

이러한 기록 외에 새로운 온천공을 개발하기 위한 시도가 일제강점기 내내 있었던 사실이 여러 차례 확인된다. 이처럼 일제가 본격적인 침략의 마수를 뻗기 시작한 1905년부터 수안보온천을 주목했고, 온천맛을 아는 일제에 의해 본격적인 관광지로서 수안보온천 개발이 시작되었다 1917년 1월 12일자 『매일신보』에는 괴산(槐山) 소식으로 ‘수안보에 재한 온천은 약 2백여년 전에 발현된 바이나, 그간 구조의 불충분하더니 거년(1916) 8월부터 동 면장과 개목(皆木;니마키) 헌병소장의 발기로 570여원의 동유재산(洞有財産)으로 대개량을 가하였는데, 목하 성황을 암상(暗想)하면 장래의 일대 승지가 될 희망이 유하더라’고 소개하였다. 이후 수안보온천을 찾는 손님은 꾸준히 증가하였으며, 1928년 12월에 충북선이 청안역(증평)에서 충주역까지 연장개통되면서 새로운 호황을 예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호재를 계기로 1930년에는 상모면 재산이었던 수안보온천 운영에 대한 위탁경영 계약이 체결되었다. 충주에서 성광관(星光館)이라는 여관을 운영하던 이주 일본인성야죽치(星野竹治;호시노 다케하루)의 손에 경영권이 넘어간 것이다.

 

【청주】 괴산군 상모면에 재한 수안보온천은 매년 5, 6만 명의 욕객(浴客)이 내왕함에 지(至)하여 성황을 정(呈)하는 상태이나 설비가 불완전함을 일상 유감으로 사(思)하던 바 금반에 온천 소유자인 해 면 당국에서는 충주읍내 여관업 성광관(星光館) 주인에게 위탁경영을 허(許)하였음으로 성광관 주인은 약 3만원으로 수안보온천을 충분히 설비하기로 작정하고 금년 내로 공사에 착수하리라는데 금후로는 일층 욕객이 증가되리라고 한다. 해 온천은 충북선 충주역에서 자동차로 약 40분이 걸린다 한다. (매일신보, 1930년 12월 20일자, <각지편신>)

 

수안보에도 성광관이라는 여관이 생겼으며, 이것은 해방 후에 유명했던 산수장(山水莊)으로 기억하는 그것의 시작이었다. 이처럼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수안보온천의 역사는 대부분 20세기에 일제가 조선을 침탈하면서 시작된 침탈사로 점철되어 있다. 그렇다면 수안보온천에 대한 우리의 온전한 온천사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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