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충주와 관련된 몇 건의 지도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1910년~1916년 사이에 충주시내의 변화상을 지도를 통해 추적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특히 1913년 9월 12일부터 1916년 9월까지 진행된 충주시구개정의 전ㆍ중ㆍ후 상황을 지도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대상이 되는 지도는 ① 1910년 측도(2차), 1913년 제판된 1:5만 지도 ② 1912년에 계획한 충주시구개정도(1:6천) ③ 1914년 측량의 충주군 지적도(1:1,200) ④ 1915년 측도(3차), 1916년 제판된 1:5만 지도 ⑤ 1916년 측도, 1917년 제판된 1:1만으로 모두 5종을 시간순으로 비교하여 볼 수 있다. 여기에 아직 확인되지 않는 것이 1:5만의 1차 측도에 의해 만들어졌을 1910년 이전의 지도이다.
①과 ④의 5만분의 1지도는 충주 전체의 변화상을 살피는데 유용하다. 다만 충주시내, 즉 과거 충주읍성이 충주시구개정에 의해 파괴되기 전과 후의 상황이 생략된 시가지 표현에서 구별된다. 1910년에 측도된 것에서는 읍성을 중심에 두고 중요 접근로 몇 개만 표시된 단순 구조의 시가지를 표현해 놓았다. 자세히 보면 동남북면의 성벽과 서벽은 제2R에서 혜상칼라 앞까지 표현됐고, 동ㆍ남ㆍ북문이 그려져있다. 반면, 1915년에 측도된 것은 읍성이 파괴 철거되고 충주시구개정도에 반영된 십자형 시가지가 복잡하게 표현돼 있다. 그리고 두 지도를 정밀하게 대조해보면 미세한 지형의 변화와 함께 지명의 변화를 함께 볼 수 있다. 또한 산포된 단위 마을의 규모 변화 역시 비교해 볼 수 있다.
②의 충주시구개정도는 1916년에 발행된 충주발전지(忠州發展誌)에 실린 것으로 염해천(鹽海川)과 사천(泗川) 안쪽의 중심시가지를 본래 있던 길을 두고 새로 구획한 직선도로를 덧씌운 모양이다. 이것의 등장은 1912년 11월이다.
충청북도 충주는 구 관찰도(觀察道) 소재지로 한강(漢江)의 수리(水利)를 이용하야 상취인(商取引)도 은성(殷盛)을 극(極)하되 시가(市街)는 구래에 무이(無異)하야 소호(小毫)도 개(改)치 아니하얏더니 금회에 사세국(司稅局) 엽연초(葉煙草) 경작지(耕作地)가 건설된 결과 기 수송 도로로 탄금대(彈琴臺)까지 3간 폭 도로를 개착(開鑿)하기로 된 동시에 시내도 성벽을 취훼(取毁)하고 종횡으로 시가도로를 통할 설계가 성(成)하야 불원에 착수한다더라.(매일신보. 1912년 11월 14일자, 2면 3단, <충주시구개정>)
기사에서 보이는 것처럼 ‘설계가 성(成)’하였다는 것은 충주시구개정도를 그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1912년 당시의 충주시내와 일본인들이 계획한 충주시내가 겹쳐져 있는 것이 충주시구개정도이다.
이를 보완하여 볼 수 있는 것이 1914년 11월 19일 ~ 1915년 3월 23일까지 측도한 ③의 충주군 충주면 충주읍 원도(原圖), 즉 지적도이다. 삼각측량에 의해 1:1,200의 축척으로 그려진 지적도는 지금의 성내동ㆍ성서동ㆍ성남동ㆍ충인동ㆍ충의동 지역을 포괄한다. 1913년 9월에 시작된 충주시구개정 사업에 따라 성벽을 훼철한 직후의 상황을 반영하였다. 또한 당시에 충주에 이주한 일본인들의 도심 장악 상황을 지적도상의 소유주 관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반대로 그것은 이 땅에 살던 충주 사람들이 터전을 잃고 쫓겨난 상황을 반영하는 결과로도 해석할 수 있다.
⑤의 1:1만 지도는 충주시구개정이 끝난 직후의 상황을 정밀하게 그려놓았다. 특히 1914년 11월, 즉 낙엽이 지고 충분한 시야가 확보되기 시작한 시기에 착수해 측도한 지적원도가 수정보완을 거쳐 완성되던 시기에 충주면 지역을 대상으로 정밀 측량한 결과물이어서 앞으로 여러 방면에서 다양하게 이용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이 중에서 지적도가 가장 정밀할 것 같으면서도 까다로운 자료이다. 지난 두 달간 충주 시내의 동(洞) 지역을 대상으로 지적도 붙이기 작업을 했다. 전체를 각 동별로 잇고, 거기에 길과 물길을 표시한 후에 전체를 연결하여 보았다. 연수동 지역을 답사 관계로 따로 정리하면서 1997년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했었던 성황사(城隍祠)와 함께 그간 위치를 찾지 못했던 여제단(厲祭壇)을 찾기도 했다. 또한 연원역(連原驛)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에 대해서도 여타 자료와 함께 살핀 결과 가늠할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 지적도를 어떻게 읽고 활용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값은 큰 차가 있음을 알았다.
유사한 사례로 단월역(丹月驛)에 대한 시비가 있어왔기 때문에, 단월리(丹月里) 부분만 따로 작업하여 길과 물길, 그리고 전답, 대지 등의 지목별 표시를 하기도 했다. 그것을 통해 단월역의 위치와 규모 역시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도 했다.
그리고 충주시내를 감싸는 염해천과 사천의 관계를 따로 살피기 위해 염해천을 중심으로 하는 지적도 잇기 작업과 사천을 중심으로 하는 지적도 잇기 작업을 따로 진행했다. 상식적으로 알고 있을 일이지만, 결국 작업을 통해 재확인한 것은 충주를 감싸며 흘러가는 두 개의 내는 대부분의 물이 남산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보는 앞(남면)에서 골짜기마다 나린 물은 흐르며 합쳐서 염해천(지금의 교현천)을 이룬다. 또한 뒤(북면)의 골짜기마다 나린 물과 발티에서 시작되는 몇몇 물줄기가 합쳐져 사천을 이루어 대봉교 위에서 만나 충주천으로 달천에 닿아 한강으로 흘러들어간다. 도시의 생성과 구조에 있어서 물줄기가 작용하는 방식을 지적도 작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그동안의 숙제였던 충주외성(外城)을 찾기 위한 밑그림 역시 지적도를 이어붙여 만들었다. 새로 확인된 호암택지지구의 호암토성과 함께 사진으로 남아있는 토성의 지점이 어디인가를 지적도를 통해 확인했다. 그래서 나머지 부분들을 찾아 물과 산과 성으로 겹겹이 둘러쌓인 충주의 기본 구조에 접근하고자 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적도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충주읍 지적원도이다. 5장으로 나뉘어진 이 지적도는 시구개정을 통해 성벽을 훼철하고 직전으로 이어그린 시가지와 일본인들의 충주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그들 소유의 토지로의 전환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다만, 조밀한 구조에 뭉개진 선 등으로 인해 8배로 확대하여 트레싱지로 대지를 만들고, 여기에 토지조사부와 지번을 대조하여 충주읍 전체의 1914년 상황을 따로 제작했다.
소유관계에 있어서 충주읍성 내에 있던 관공서 건물은 주로 국유지로 표시되지만, 그 외의 대부분은 일본인 소유로 변경된 것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동시에 1913년 충주시구개정이 시작되기 전에 575가구에 2,555명의 충주사람이 거주하던 공간이었으나, 1915년 4월에 199가구 1,000명만 남게 된 이유를 설명해 주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또한 단순한 오류라고 보아 넘기기엔 이해가 안되는 해방 후의 새로운 동명(洞名) 부여 과정에 대한 모순이다. 즉, 읍성이 존재했던 내부공간을 성내동(城內洞)으로 하고, 그 남문을 중심으로 남벽 밖의 공간을 성남동(城南洞), 그리고 서문을 중심으로 서벽 밖의 공간을 성서동(城西洞)으로 했을 법한데, 성서동은 한 블록이 성내동에 들어와 있다. 성벽의 공간적 위치 문제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상황에서 진행된 동(洞)의 분할 과정의 모순이 그대로 반복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는 현실을 보면, 우리가 우리 공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다시한번 느끼게 되는 부분이다.
특정한 자료 하나가 모든 것을 대변하거나 해결할 수는 없다. 다만, 해를 이어 커가는 나이테처럼 1910년을 시작으로 1~2년 상간으로 제작된 각종 지도류의 존재는 조선시대 존재했던 충주읍성의 공간 파괴와 일제에 의한 일본식 식민도시로의 완전 탈바꿈의 진행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100년 넘게 지속된 공간 변화의 첫 점이며, 동시에 기준이 되어있다. 장점은 우리 것으로 만들면 되지만, 잘못 끼워진 단추로 인해 생기는 모순을 반복하는 일은 지양(止揚)해야할 일이다. 그것이 단순한 지도들의 비교 나열에 그치지 않고 공간변화의 기준점 내지는 좌표를 설정하는 의미에서 정밀하게 읽어 해석해 낸다면, 그것은 곧 충주의 공간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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