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충주향교의 멈춘 시간, 1872년~1945년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10/02 [11:36]

125. 충주향교의 멈춘 시간, 1872년~1945년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10/02 [11:36]

 

1872년 충주목지도(忠州牧地圖)에 충주향교는 풍화루(風化樓)라는 2층 누문(樓門)의 정문을 지나면 앞에 명륜당과 뒤에 대성전을 중심공간으로 두고 있었다. 당시의 읍사례(邑事例)에 충주향교를 중심으로 행해지던 석전제(釋奠祭)에 대한 기록도 있다.

 

“헌관(獻官) 14원(員), 대축(大祝) 1원, 봉향(奉香) 1원, 봉로(奉爐) 1원은 입재(入齋)에서 파재(破齋)까지 이른다. 관청에서 가을에 세 차례, 봄에 두 차례 공궤(供饋)한다. 제 집사는 6원으로 저녁 한때 공궤한다. 교생(校生) 90인은 30인으로 다시 정했다. 제향(祭享) 집사생(執事生) 20인, 수리(修理) 유사(有司) 9인, 모속(募屬) 160명, 완호군(完護軍) 40명, 재직(齋直) 11명은 모두 혁파됐다.”

 

고 하여, 1871년 서원철폐령과 함께 향교의 영향력 또는 위의(威儀)에 대한 축소가 가해진 것을 알 수 있다.

 

1896년 2월 18일부터 3월 7일까지 진행된 을미의병 호좌의진의 충주성 점령 기간 중에 불탔다. 그리고 1897년에 새로 지었다. 건물만 복구된 형국이다. 화재로 인해 그간 전해오던 문서와 책의 많은 부분이 불탔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일에 앞서 충주향교의 두드러진 역할이 두 가지 확인된다.

 

하나는 지금은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의 서원말에 있는 운곡서원(雲谷書院)의 복설(復設)에 관한 것이다.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충주군 관내의 여느 서원과 마찬가지로 문을 닫았다. 그러나 1892년 충주지방 유림의 발의로 단을 만들어 제향을 지냈고, 유림의 복설 청원에 의해 1894년 운곡서원이 부활됐다. 그리고 1895년 주희(朱熹)의 옛 영정을 가져와 봉안하며 서원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이 일의 중심에 충주향교의 역할이 있다. 향교를 중심으로 움직였던 충주지역 유림의 활약이 있다.

 

다른 하나는 1895년 9월에 공포된 소학교령(小學校令)에 따른 신식학교 설립에 관한 일이다. 즉, 현재 확인된 기록에 따르면, 1896년 1월 29일자로 충주공립소학교(또는 충청북도관찰부공립소학교)에 첫 교사인 황한동(黃漢東)이 발령됐다. 신식 학제의 시행을 위해 중앙에서는 한성사범학교를 세워 교사를 양성했다. 1회 졸업생인 황한동이 충주에 부임한 것은, 그에 앞서 소학교에 관한 공간, 재정 등의 문제가 사전에 준비된 상태에서 가능하다. 이 준비과정에 충주향교는 지역 교육의 중추기관으로서 학교 운영 재정에 관해 운곡서원의 원토(院土) 도조(賭租)를 제공했다. 그리고 중앙에서 파견한 교원(敎員)을 보조하며 실질적인 학교 운영에 관계했던 부교원(副敎員)을 충주향교에서 추천한 지역의 덕망있는 유학자로 삼았다. 교육기관으로서 본래의 역할을 신교육의 태동단계부터 보조적으로 협조해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05년 초에 충주공립소학교의 임시 교사(校舍)로 충주향교의 명륜당(明倫堂)이 대용된 점에서도 확인된다.

 

▲ 충주목지도(1872)에 표시된 충주향교 : 정문은 풍화루(風化樓)라 하였고, 향교와 함께 사마소(司馬所)가 있었다.  

유교를 중심으로 하던 조선의 끝자락에서 지방교육의 중추기관이었던 충주향교는 시대 변화에 순응하며 위축되었다. 전화(戰禍) 아닌 전화로 보관해오던 문건을 잃은 채 일제강점기로 접어들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제 점령함에 따라 충주 역시 식민도시로 전락했다. 그리고 충주향교에 가해진 첫 번째 일이 향교 소유 토지에 관한 간섭이었다. 1912년 9월 24일에 충주소작인조합(忠州小作人組合)이 만들어졌다. 그 대상자는 향교와 서원의 토지 소작인이었다. 조합 결성의 명목은 농사개량, 부업장려, 농기구 개선, 물품 공동매입 및 판매, 저축 등이었는데, 상황을 비틀어보면 향교 관련 토지에 대한 일제의 직접적인 간여 내지는 간섭이 시작된 것이다.

 

또한 1924년에는 향교 조직의 분리 작업이 시작된다. 1924년 5월경에 명륜구락부(明倫俱樂部)라는 하부 단체를 조직하고, 이어 보통학교 등에 진학하지 못하는 어린이를 수용하기 위한 명륜학술강습회(明倫學術講習會)를 설립하였다. 이 강습회에는 1925년 1월에 50명의 학생이 참여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교육기관의 명분을 이으며 동시에 향교 운영의 실제에 간섭하는 현상으로 파악된다. 과거 충주향교 앞에 별도 건물로 사마소(司馬所)가 있었다. 충주 유림의 활동 중심공간이 향교였다면, 그와 상호 협력적이었던 사마소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토착 유림 세력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상황에서의 일제에 협조적인 전위기구의 생성으로 구락부의 신설과 그 사업 단위로 강습회를 조직하여 실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된다.

 

명륜구락부는 명륜회라고도 불렸다. 이 단체는 전래적인 백일장을 개최하며 전통의 명맥을 잇는 사업을 벌이는 동시에, 지역의 효자 절부 등 효(孝)에 바탕을 둔 모범자들을 발굴ㆍ표창하는 사업을 병행했다. 학술강습회 외에 1928년에는 충주명륜청년회야학(忠州明倫靑年會夜學)을 설립해 별도의 학습 기구를 두었다. 이의 운영 주체인 명륜청년회는 1926년에 설립하였는데, 조선조 마지막 유림 세대가 끝난 다음 세대를 중심으로 일제에 협조적인 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직ㆍ운영하였다. 향교가 가지는 고유성 내지는 정통성을 하나씩 폄훼시키며 친일적인 전위조직으로 변형시켜가는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본적인 향교 조직 장악에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린 일제는, 그들의 조종 내지 암묵적인 지원에 의한 명륜회(明倫會)를 중심으로 지역 또는 광역 단위의 조직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재산에 대한 간섭과 장악, 향교 조익에 대한 분열 획책, 그리고 그들 입맛에 맞는 전위조직의 구성을 마친 일제는 1932년에는 일제의 통치를 합리화시키는 교화촉탁(敎化囑託) 또는 서기(書記), 기수(技手)를 각 군단위로 배치하며 이들에 대한 일체 경비를 군의 향교 재산을 사용하는 것을 강제하였다. 시범적으로 음성ㆍ옥천ㆍ괴산ㆍ충주 등 4개 군에 전속 교화촉탁을 배치하여 소위 갱생운동(更生運動)의 전위대로 향교를 이용하기도 했다.

 

교화촉탁 위촉과 갱생운동을 전개하며 향약(鄕約)의 시대화를 내세워 유림간담회를 열어 도 단위의 계획을 수립ㆍ결정한다. 1933년의 일이다. 이에 따라 세부적으로 각 마을 단위의 진흥회ㆍ청년단ㆍ부인회 등 말단 조직을 가동하여 예회(例會)를 개최하고, 그들의 선전 선동을 구체화시키는데 향교의 위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1934년 9월에 발표된 예회 계획에 의하면 대가미(大加味)ㆍ야현(冶峴)ㆍ교동(校洞)ㆍ원용산(元龍山)ㆍ빙현(氷峴)ㆍ안심(安心)ㆍ어림(御林)ㆍ범의(凡衣)ㆍ연원(連原)ㆍ동수(東守)ㆍ원호암(元虎岩)ㆍ관주동(貫珠洞)ㆍ직동(直洞)ㆍ발치(發峙)ㆍ하단월(下丹月)ㆍ상단리(上丹里)ㆍ상하풍동(上下楓洞)ㆍ동명(東命)ㆍ대가주(大佳洲)ㆍ소가주(小佳洲)ㆍ관산(觀山)ㆍ상용두(上龍頭)ㆍ원달천(元達川)ㆍ달신(達新)ㆍ송림(松林)ㆍ하방(下方)ㆍ상방(上方)ㆍ봉계(鳳溪)ㆍ금대(琴臺)ㆍ칠지(漆枝)ㆍ신촌(新村)ㆍ금제(金堤)ㆍ목수(牧水)ㆍ행정(杏亭)ㆍ종당(宗堂)ㆍ무음(武音)ㆍ사라곡(沙羅谷)ㆍ구동(臼洞)ㆍ기탄(岐灘)ㆍ용동(龍洞) 등 충주읍 주요 마을에 진흥회 이름이 등장한다. 또한 안림(安林)ㆍ교동(校洞)ㆍ동수(東守)ㆍ행정(杏亭)ㆍ단월(丹月)ㆍ신대(新垈)ㆍ봉계(鳳溪)ㆍ 중앙(中央)ㆍ송림(松林) 청년단과 행정(杏亭)ㆍ연원(連原)ㆍ동수(東守)ㆍ안심(安心)ㆍ도촌(島村)ㆍ예성(蘂城)ㆍ충주(忠州) 부인단 등의 마을 단위 조직의 이름이 나열된다. 예회를 통한 최소 마을 단위 활동을 통해 일제는 의례준칙(儀禮準則)이란 것을 내세워 일상에 침투ㆍ전파케 했다. 그 전위조직으로 조선 전래의 향교를 위에서부터 장악하며, 그들의 필요에 의한 전위기구화하며 지극히 조선적인 것처럼 위장하여 정신적인 침탈 내지 조작을 확대해 나갔다.

 

이러한 일련의 일을 진행해가면서 일제는 상징공간인 향교의 보수ㆍ개수 작업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기록된 향교의 수리 보수 사항을 보면, ① 1917년 11월, 충주군수 윤석필(尹錫弼) 씨 부임 이후 각 면에 2인씩을 선발하여 26인을 유사(有司)로 정하고 유사회(有司會)를 통해 수리비용 1,300여원을 분담하여 향교 수리, ② 1920년대 중반, 주덕 제내리 이희창(李羲昌) 씨의 희사로 명륜당의 기와 교체 공사, ③ 1934년 8월 충주군수 전석영(全錫泳) 씨를 명륜회 기성회장으로 하여 유림 계급 및 기타 각 읍면장 외 관하 400여 구장의 협조를 얻어 7,700원을 염출하고 향교 전반에 대한 개수공사를 시행하여 명륜당과 동무(東廡)ㆍ서무(西廡)ㆍ외삼문(外三門) 등을 1935년 9월에 준공 등의 상징공간에 대한 유지보수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명륜당에 부속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사라졌다. 지금 명륜회관과 향교 사이의 신작로가 나면서 동재ㆍ서재가 헐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시기에 대한 확정은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1935년에 외형상 그럴듯한 충주향교의 개수공사가 이루어진 후에, 일제는 전국적으로 심전개발(心田開發)이라는 사업을 강행하기 시작했다. 이 사업의 주도는 경학원(經學院)이 중심되고, 각 지방의 향교, 즉 명륜회를 중심으로 전파되었다. 심전개발의 중심 내용은 국체관념의 함양, 색복 착용의 보급 철저, 혼상제 의례의 개선 등인데 일상생활과 정신 영역을 아우르는 식민지 정책의 확대현상이다.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전쟁 상황으로 전변된 상황에서 일제는 황국신민정책을 극도로 강화했다. 기존에 시간을 두고 자기화시킨 향교조직을 이용함과 동시에 군 단위 중심공간인 신사(神社)와 면 단위까지도 신사(神祠)를 만들게 하는 극단적인 정신침탈을 병행했다. 그런 중 1939년에는 기존의 명륜회(明倫會)를 해산하고 유도회(儒道會)라는 이름으로 재결성하여 선전 선동활동에 동원하였다. 그런 중에 충주향교의 시간은 멈췄다.

 

멈춘 시간은 흘러 2019년이 되었다. 여느 지역보다도 훨씬 심한 피해가 있었던 충주향교는 명칭은 존재하지만 그 내실에 있어서 자기 정체성 확립에는 소극적이다. 1개 사회단체적인 성격을 비추는 것도 역사도시의 중심기관이었던 위상에 맞지 않는다. 모든 것이 사람의 일이다. 충주향교의 구성원들이 자각하고 진심으로 노력할 때에, 충주향교의 시간은 다시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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