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충주 객사(客舍) 중원관(中原館)의 봉인(封印) 해제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10/02 [17:05]

126. 충주 객사(客舍) 중원관(中原館)의 봉인(封印) 해제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10/02 [17:05]

 

충주에서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공간, 충주읍성 중심 공간의 하나였던 객사(客舍)는 시쳇말처럼 KT 건물을 지으며 그 흔적조차 파묻었을까? 수긍할만한, 납득할만한 설명이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다.

 

대답부터 하면, 충주 읍성의 중심공간이었던 객사는 절반은 파묻혔고, 절반은 남아있다. 물론 건물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존재했을 공간에 대한 얘기다.

 

객사에 대해 보통 ‘① 고려ㆍ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官舍), ② 지방 군현(郡縣)에 마련된 국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한 정당(正堂)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숙박하는 건물을 합친 시설을 말한다’ 등으로 찾아진다. 이러한 일반적 정의의 실제인 객사를 충주에서는 볼 수 없다. 그 시작과 끝에 대한 정리가 되지 않은 채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충주읍성 내에 있었던 객사에는 ‘중원관(中原館)’이라는 당호(堂號)의 편액(扁額)이 걸려 있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이래로 중원경(中原京)이라 이름붙인 도시의 역사적 위상을 대표 건물의 이름에 반영한 결과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누정(樓亭)조에서 경영루(慶迎樓)를 ‘객관(客館) 동쪽에 있고, 옛 이름은 동루(東樓)이다’라고 하여 객사의 존재와 그 부속 건물의 위치를 설명하였다. 이에 대한 정인지(鄭麟趾;1396~1478)의 기문(記文)에서 ‘동루’로 불리던 건물이 ‘경영루’란 이름을 얻게 된 내력을 적고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1442년(세종 24) 가을에 경주에 있던 태조(太祖)의 영정을 서울로 옮기는 중에 충주를 지나게 되었다. 정청(政廳)이 낮고 누추하여 객관 동쪽 누각에 영정을 모셔 하룻밤 머물렀다. 다음날 영정을 전송한 후 돌아와 논의가 있은 후, 영정이 모셔졌던 동루의 개축을 결정했다. 중 신정(信靖)이 주관하고, 고을 사람 민수(閔修)가 감독하여 한 달 만에 공사를 끝냈다. 새로 지은 누각을 경영루(慶迎樓)라 하였는데, 이는 어용(御容)을 받들어 맞은 뜻을 취한 것이다.’ 정도이다.

 

이 뒤로 충주에서 근무하거나 또는 객사에 머물렀던 관료들이 경영루의 사연과 관련하여 지은 시를 수록하였는데, 태조 이성계의 어영이 머물렀던 공간의 의미와 충주에 대한 각자의 생각과 느낌을 담은 시편들이다. 그 중에서도 성현(成俔)의 시에서 그린 충주는,

 

지비천간별유구(地秘天慳別有區) : 땅이 숨기고 하늘이 애끼는 별난 이곳엔

 

죽리모옥압성우(竹籬茅屋壓城隅) : 울타리 둘러친 초가집들이 읍성을 압도한다.

 

사산운물미하제(四山雲物迷遐睇) : 산골짝 같지만 모여드는 물산은 보기에도 아득하여

 

만리곤붕신장도(萬里鵾鵬辰壯圖) : 만리 곤붕이 그 뜻 펼칠 만큼 크디 크다.

 

양류강구비여란(楊柳康衢飛黎亂) : 버드나무 늘어선 너른 길엔 흙먼지 자욱하고

 

고포단안명금호(菰蒲斷岸瞑禽呼) : 물풀 우거진 물가 언덕엔 온갖 새들이 울부짖는다.

 

동풍불석춘광로(東風不惜春光老) : 건들 부는 동풍은 저무는 봄빛을 애틋해잖고

 

취파잔홍점록무(吹擺殘紅點綠蕪) : 외려 이우는 꽃을 떨궈 푸른 들이 넘실댄다.

 

라고 하여, 역사도시 충주를 그려놓고 있다. 이는 경영루라는 특정 공간을 대상으로 지은 것이지만, 충주 객사에 머물며 역대 왕조의 위업과 충주의 관계를 이어놓은 최대의 극찬이었다.

 

객사의 규모를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44칸이라고 했다. 1759년의 상황인데, 임진왜란의 참화를 겪은 뒤에도 그 위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이 1870년의 <호서읍지(湖西邑誌)>에는 48칸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의한 기록인 <한국충청북도일반>(1909)에는 충주의 관아공해(官衙公廨)를 기록하면서 객사의 존재는 누락시켰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 의하면 1916년 충주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 부설로 만들었던 충주간이농업학교(忠州簡易農業學校)의 교사(校舍)로 객사가 이용되었었다. 그 사실을 반영한 것이 1916년에 측량된 1대 1만분의 1 충주지형도이다.(사진 참고)

 

이 건물은 해방 후에도 일정기간 존속됐던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그 자체에 대한 기록은 정리되지 않았다. 다만 관아공원 공터에 1933년에 새로 지었던 충주군청(중원군청)이 공비의 방화로 불탈 때 같이 불탔다는 얘기 정도가 객사에 대한 지역에서의 기억일 뿐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KT 건물이 들어설 때 편입되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 1916년에 측량된 1:1만 지형도 관아공원 부분. 文으로 표시된 공간이 충주 객사 중원관이 있던 곳이다. <자료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사이트 소재 지도>  

그런데, 과연 객사 자리가 KT 건물에 완전히 편입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 하는 의문은 일종의 미련일 수도 있다. 1872년에 그린 <충주목지도>에 ‘객사-동대청-서대청-중삼문’에 담장이 둘러쳐진 공간의 변형이 시작된 것이 1912년에 그려진 <충주시구개정도>에서 설핏 보인다. 즉, 객사 동쪽에 지금의 KT 후관 건물 자리로 읍성 북벽에 이르는 길이 하나 만들어졌다. 그것은 1908년 2월에 단독 건물로 들어선 충주공립보통학교와의 경계에 해당된다. 그리고 1916년에 1년제로 설치된 충주간이농업학교의 건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1916년의 지형도에는 보통학교 이외에 ‘문(文)’으로 약칭한 공간이 나온다. 일제가 만든 지도에서 文은 학교를 뜻한다. 이 시기에 충주에는 보통학교와 소학교가 있다. 소학교는 일본학생들의 전용학교였고, 보통학교는 조선인들이 다니는 지금의 교현초등학교의 전신이었다. 그 외의 별도 공간의 文은, 1916년에 만들어진 충주간이농업학교이다. 그 공간이 객사였다. 객사의 공간적인 위치가 이 지도에서 확인된다.

 

객사 동쪽에는 보통학교가 있고, 그 중간에 충주시구개정을 통해 만든 새 길이 뚫렸다. 그리고, 객사 앞에는 국민은행 충주지점 쪽에서 올라오는 골목의 연장선이 표시되어 있는데, 객사 직전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온다. 그 안쪽 지점이 충주우체국장 관사가 위치한 곳이다.

 

이 한 장의 지도에 표시된 지점이 중요한 이유는, 객사가 KT 건물이 들어오면서 완전히 파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속설을 부정할 수 있는 긍정의 힌트가 있기 때문이다. 성내동우체국으로 불리는 구 충주우체국에서 KT 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중간에 골목을 하나 만난다. 테니스장이 있는 그 골목으로 들어가서 왼쪽 끝집이 우체국장 관사이다. 그 대문 앞에서 KT 방향으로 보면 1미터 남짓한 골목이 가까스로 살아있다. 바로 지도에 표시된 대각선 길의 흔적이 된다.

 

그 골목을 따라 나가면 약간 왼쪽으로 또다른 골목을 만난다. 그리 들어가면 입구의 두 배 정도 되는 공간을 만나고, 끝에 집이 하나 가로막고 있다. 시구개정도나 1916년 지형도에 표시되었던 길이 옮겨진 상황인데, 그 넓은 공간이 바로 文으로 표시된 객사가 위치했던 공간이다.

 

충주라는 이름이 생겨나며 그 건강하고 아름다운 생명이 잉태된 연당이 정지상의 붓끝에서 그려졌던 곳, 그리고 성현의 붓끝에서 그려진 광대하고 별난, 그래서 땅이 숨기고 하늘이 애낀 이 땅 충주의 노래가 만들어진 객사는 어렴풋 그 흔적을 아직 숨겨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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