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안보역(安保驛)의 오늘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10/02 [17:12]

129. 안보역(安保驛)의 오늘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10/02 [17:12]

 

중부내륙철도 공사가 충주 인근에 한창이다. 경기도 이천과 충주 그리고 경북 문경을 잇는 공사구간에 9개의 역(驛)이 신설된다고 한다. 이 중에 충주-문경 구간에는 살미역(311번)과 수안보역(312번)이 계획돼 있다. 수안보역은 안보리 산22-1 일대에 자리할 계획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역제(驛制)가 시행되던 시기에 안보역(安保驛)이 있던 마을의 북쪽 산 중간에 해당된다. 1894년 갑오경장에 따른 역제의 폐지 이후 21세기에 다시금 역마을로 자리를 찾는 격이다.

 

역제가 폐지된 1894년에 안보리에 찾아온 첫 변화는 일본군 병참소의 설치였다.

 

1894년 7월 25일 [甲午七月二十五日]

 

일본 병사가 충주를 지나간 일은 이미 임금께 급히 보고하였으며, 오늘 접한 연풍현감 한진태(韓鎭泰)의 보고 내용에, “7월 17일 문경부(聞慶府) 공형의 방위사통(防僞私通)을 접해 보니, 일본 중장(中將) 일행 30여 명이 방금 도착하였으며, 고군(雇軍) 355명을 연풍현에 통문으로 연락하여 내일 이른 아침에 색리(色吏)를 정하여 안보참(安保站)에서 인솔하여 기다려 달라고 일본인이 직접 청하러 왔습니다. 이는 동래(東萊)에서부터 올라오는 연로의 각 읍을 통행하는 관례라고 하였습니다. 짐꾼의 삯과 먹을 것에 대한 값은 수대로 내어 주어 처음부터 폐해를 끼친 일은 없으며, 백미·피모(皮牟)·간장·큰 나무로 된 반상·사기·솥 등의 물건들은 요청한 것에 의거해 주겠다고 하였으므로, 고군 355명과 함께 장리(將吏)를 입회하여 안보참으로 보내 호송하도록 하였습니다.

 

18일 지나갈 때, 짐꾼 중에 짐을 지지 않은 자들에게는 고가(雇價)를 주지 않았는데, 등이 구부러지고 넘어지는 등 모습이 애처로웠습니다. 조령(鳥嶺)에서 충주에 이르기까지 50리의 근처 5개 동(洞)은 백성들이 모두 놀라서 겁을 먹고 도망하여 마을들이 비었으며, 일본군들은 매일 30~40명, 혹은 40~50명 정도가 계속 이어져 끊이지 않았고, 또 전신선을 가설[架電]한 후에 안보동(安保洞)에 분국을 설치하였는데, 거의 수백 명이 여전히 머물고 있어서, 놀라서 흩어진 백성들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잘 타일러 경계하도록 하여도 조금도 정돈되지 않아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연유를 급히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통과하는 일본군은 적절하게 응대하고, 흩어진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어루만져 주어야 합니다. 이후의 상황은 연속하여 급히 보고하라고 단단히 타이르고 명령을 보냈습니다. 그러한 연유를 임금께 급히 보고 드립니다.(<금번집략(錦藩集略), 별계(別啓), 갑오년 7월 25일(음))

 

부산 동래에서 시작해 연결해 올라오는 전보선을 안보동에 분국을 설치하고 그곳에 주둔한 일본군은 또다른 형태의 역 기능의 전환 또는 변화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은 점점 곤궁해졌다.

 

1896년 을미의병운동이 전개되면서 안보리는 큰 피해를 입었다.

 

(1896년) 8월 14일 내부대신 박정양 씨 보고가 군부에 왔는데, 그 전 충주관찰사 민영기 씨가 보고 내에 연풍군수 보고를 보니, 지난 4월 문경군 오봉정에서 노학수가 비도 괴수 100명을 데리고 출몰하여 작폐하다가 청주 병정에게 쫓겨 흩어지고, 괴수 김한성 엄봉치가 일인에게 잡혀 죽었는데, 5월 20일 비도 30여 명이 총과 칼을 가지고 관문에 들어가서 김한성을 죽였다 칭탁하고 군수와 관속을 결박하고 무수히 난타하여 가두고, 돈 3000냥과 군복 3000벌을 달라고 곤욕을 보이니 할 수 없어 돈 120냥을 간신히 출판하여 주니, 비도들이 본군 안보동으로 가서 백성의 집 134호를 불을 놓음에 동리 사람 셋이 죽었은즉, 거기 군대에게 신칙하여 비도를 급히 치게 하리라 하였다더라.(<독립신문>, 1896년 8월 18일자, 2면 3단)

 

이번에는 문경 방면에서 들어온 노학수란 인물이 이끄는 100명의 의병이 연풍현을 점거했었다. 그리고 안보동에 들어와 134호의 민가를 불지르고 동네 사람 셋을 죽이는 대사건이 있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기와 1896년 을미의병전쟁기에 입은 피해 또는 변화는 안보역이 폐지된 직후에 이어진 연속 사건이었다.

 

▲ <자료 : 1915년 측량된 지적원도 안보리 부분> ①은 안보역(安保驛) 추정지 ②는 넓은 단독대지 구간으로 안보병참(安保兵站)과 관련하여 추가로 연구할 공간 ③은 중부내륙철도 신설 수안보역 예정지 

 

안보역의 규모를 <여지도서>에서는 대마 3필, 기마 6필, 복마 6필 등 총 15필의 역마와 역리(驛吏) 25명, 역노(驛奴) 106명, 역비(驛婢) 28명으로 적고 있다. 조령과의 중간에 신풍역(新豊驛)이 있었고, 안보역을 거쳐 단월역에 이르는 노선상에 있었다. 안부역(安富驛)이라 표기된 곳도 많다.

 

역의 위치를 1910년대에 측량된 각종 지도ㆍ지적도 자료에서 확인하여 현재 위치와 비교해 볼 수 있다. 현재의 도로명 주소로 보면, 중원대로 ‘월악산 교차로’에서 대안보로 들어서면 좌측 첫 갈림길이 ‘대안보3길’이다. ‘대안보3길’은 수안보에서 대안보로 넘어오는 박석고개(일명 돌고개)에서 조감사묘를 지나 오른쪽으로 난 샛길인 ‘대안보1길’과 연결되었던 길이다. 대안보1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와 석문천과 만난 지점에 놓인 나무다리가 예전에 있었던 다리로 이어졌던 길이다. 이 대안보3길의 5, 6, 8, 9번이 지적도에서 수안보면 안보리 299. 300. 319, 320번지 지역에 해당된다. 이 지번은 1915년에 측량된 지적원도의 지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지목은 모두 대지(垈地)이다. 마을 사람들의 증언은 이 일대가 예전 역 자리라고 한다.

 

해당 지번 중 299, 300번지는 1915년 당시에 국유지였고, 319번지는 박치경(朴致敬)의 소유, 320번지는 일제강점 초기에 충주 지역에 대규모 토지를 점유했던 고촌심일(高村甚一)의 소유로 표시되어 있다. 역 자리의 사유화가 진행되었던 단면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지점을 1910년 측량된 1:1만지형도나 1915년 측량된 1:1만지형도에서 보면, 전신선이 통과하는 지점이다. 1915년 지형도에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1894년에 전신선을 부산 동래로부터 이어오며 안보에 일본군 병참을 설치하여 분국을 두었다는 것과 일치된다. 일부에서는 대안보경로당을 중심으로 안보역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하지만, 100년 전의 여러 가지 자료들을 비교해보면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다.

 

토지조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지적원도에 나타난 안보리의 국유지 현황은 논 14필지, 밭 21필지, 대지 17필지, 임야 1필지이다. 다른 역이 위치했던 지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집중적인 국유지의 분포가 밀집되어 나타나고 있다. 다만 380(국), 381(사), 388(사), 391(국)번지의 경우 대지이며 안보역 자리로 지목되는 지번보다 훨씬 넓은 면적으로 석문천 건너편에 위치해 있다. 안보에 있었다는 병참의 위치와 연관하여 생각해 볼 부분이다. 이것은 또한 사문리에 병참이 있었다는 증언과 그것에 근거한 최근의 기록과도 비교하여 살펴봐야 할 부분이다.

 

안보역에 대한 접근은 역 자리에 대한 확인 외에는 구체적으로 진행된 예가 거의 없다. 1896년 화재로 인해 134호가 불탔을 정도의 규모있는 마을이었고, 그것이 안보역의 중심이었다면 다른 어느 곳보다 구체적인 수치를 확인할 수 있는 지역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며 수안보온천을 중심으로 개발이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1963년에는 괴산군 상모면에서 중원군 상모면으로 편입되는 등 행정적인 변화도 있었다. 각종 기록의 이관에 있어서 원활하지 못했던 점도 있었고, 또한 수안보온천을 중심에 놓고 지역을 접근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약한 면도 있었다.

 

안보역과 관련하여 공간적인 위치 문제와 그 주변 상황, 그리고 역과 병참(兵站)의 존재에 대한 구별 등에 대해 구체적인 조사와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부내륙철도 노선에서 수안보역이 신설되는 인근의 상황에 비춰보면 소위 역세권(驛勢圈)을 중심으로 하는 개발 또는 투기 열풍이 쉽게 불지는 않겠지만, 잠재적인 공간 변화가 뒤따를 것으로 보이는 상황이다. 이러한 변화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역사적인 사실관계에 대한 보다 명확한 조사와 필요한 조치가 선행되어야 할 필요가 큰 공간이 곧 안보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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