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우연히 들려온 노래가 심장을 움켜잡을 듯 절절해 눈물이 나기도 하고, 이 세상 맛이 아니라고 해도 좋을 맛난 음식도 만나고, 여행하다 정착하고 싶은 장소를 발견하기도 한다. 책도 마찬가지라 십여년 전에 도서관에서 누군가 읽고 반납한 책을 치우다가 인생 작가를 만났다. 일본에서 ‘노스탤지어의 마술사’라 불리는 온다 리쿠를 만나 이런 작가가 있었나 갸웃거리다가 점점 그녀에게 빠져 들었다. 온다 리쿠는 1964년 출생했는데 미스터리, 판타지, 호러, SF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썼으며, 현재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미미여사라 불리는 미야베 미유키와 쌍벽을 이루는 팬텀을 형성하고 있는 작가이며, 나도 미미여사와 온다 리쿠의 책을 각각 스무권 넘게 소장하고 있다.
처음 만난 작품 ‘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제목이 너무 낯설고 흐름이 불편해 첫 장을 읽고 내 스타일이 아니라며 책장을 덮기도 했었다. 어차피 빌려왔으니 끝까지 읽어나 보자며 완독하고 반납했는데 두고두고 잔상에 남아 다시 빌려 찬찬히 읽었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4부작으로 책 속에 온다 리쿠가 아니라 글을 쓰는 작가가 등장해 이 책을 어떻게 쓸지 고민하는 장면과 석류에 얽힌 공통점을 축으로 네 가지 이야기가 서로 독립적으로 장을 이룬다. 게다가 4부작의 후속작들이 장편으로 각각 책으로 출판되어 찾아 읽으면서 작가의 독특함과 복선을 유감없이 사용하는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1부는 회장님이 책을 좋아해 역시 독서를 즐기는 사원 고이치를 저택에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고이치와 독자들은 처음으로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란 작품의 존재를 알게 된다. 작가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책으로 읽은 적은 있으나 소유한 적은 없다는 신비한 책으로, 역시 책을 읽었으나 소유하지 못한 네 사람이 고이치에게 2박 3일간 대저택에 머물며 그 책을 찾아보라는 숙제를 준다. 흑과 다의 환상(바람의 이야기), 겨울호수(밤의 이야기),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피의 이야기), 새피리(시간의 이야기)의 독특한 네 편의 이야기가 담긴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책을. 이후 이 책은 짧게 ‘삼월’이라 불린다. 2부에서 ‘삼월’을 쓴 작가에게 다가가는 출판사의 편집자 두 명을 등장시켜 작가 찾아 삼만리를 했으나 결국 작가는 우리 곁에 있었다는 결말이었다. 그래서 작가가 밝혀지고 이야기가 끝을 맺었구나 했는데, 아니었다.
3부를 처음 읽었을 때 책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들어갔다고 생각해 왜 이 이야기를 삽입했을까 궁금했는데, 이 장에 나오는 등장인물에 조명할 것이 아니라 흩뿌려놓은 듯 무심히 툭 떨구어놓은 문장들이 주인공이었다. 이 장에서는 세계 어딘가에 이야기 나무가 있어 자신의 나뭇가지에 매달린 여러 이야기 열매 중 하나가 지맥을 타고 흘러내려가 누군가의 몸에 이식되어 손끝을 타고 활자화되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탄생하고 소설이 시작된다고 한다. 4부에 와서는 대놓고 작가 자신이 ‘삼월’을 쓰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야기는 시작되며 동시에 끝난다. 사실 줄거리만 보자면 매우 불완전하고 뭔가 시작을 해 놓고 끝이 나지 않은 노래를 들은 답답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이 책의 후속작들을 읽고 나서 온다 리쿠에게 빠져들었다.
책 본문에 ‘어두운 밤, 따뜻한 실내에 앉아 재미있는 이야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마도 먼 옛날부터 세계 곳곳에서 있어왔을 행위, 역시 인간이란 픽션이 필요한 동물이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주는 것은 바로 그 한 가지뿐일지도 모른다.’라는 문장이 있다. 내가 늘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에 대해 의문을 품었었는데 그 답을 온다 리쿠가 주었다. 인간은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나는 동물이다. 말을 좀 더 늘이고 말을 연결해 이야기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이다.
그럼에도 온다 리쿠는 이야기가 사라지는 세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우려한다. ‘엄청난 스토리가 소비되는 현대에도, 결국 게임 속의 허구는 하나의 주제로 통합되고 있다. 영웅전설 혹은 영웅이 되기 위한 성장 이야기이다. 즉 가장 고전적인 테마로 회귀하고 있다. 디지털 영상시대 다음에는 무엇이 올까? 나는 어쩐지 그림이 없는 세계가 올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뇌에 직접 영상이 전달되거나 반대로 귀로 듣는 이야기가 부활하지 않을까? 모두가 똑같은 영상을 보는 것을 꺼리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책을 직접 낭독하는 것이 유행하고, 자기만의 이미지를 즐기는 것을 신선하고 세련되었다고 할 날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요즘 필사를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데 아마 이런 맥락일 것이다. 인간에게서 이야기가 없어진다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타인의 이야기를 읽는 행위를 멈추어서는 안된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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