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안보 하수처리장 앞길이나 건너길이나 어느 곳을 이용하든 수회 마을에 닿으면 ‘산림청 국립산림종자관리센터’ 입구에 선 입간판을 만난다. 국립기관인 만큼 출입 관리가 철저한 곳이다. 정문을 지나야만 볼 수 있는 <마당바위>에 가기 위해 작년에 세 번을 시도했었다.
옛길이니 과거(科擧)길이니 영남대로(嶺南大路)니 하는 그 길을 이용하던 시절, 마당바위가 수회 마을의 상징처럼 여러 글이나 시에 등장한다. 그래서 그곳은 꼭 들러야 할 곳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단체의 경우 사전 예약을 신청해야만 출입할 수 있다는 대답만 들었다. 그것도 숲해설사가 근무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만 가능하단다. 토요일에 걷는 <천리충주>는 해당이 없겠다고 생각했고, 방문을 포기했다. 또는 마당바위 코스는 숲 해설에서 제외되어 폐쇄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그런저런 사전 정보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2024년 1월 20일, 겨울비 내리는 대한(大寒) 아침에 무작정 그곳을 다시 찾았다. 마당바위 사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문 경비실에서 간단한 인적사항을 적고 아무런 제지 없이 마당바위에 들를 수 있었다. 계단을 지나 숲 사이로 야자멍석이 깔렸다. 아마도 그것이 숲 해설 코스인 듯하다. 조금 지나 이정표가 섰는데, 오른쪽으로 가라고 가리킨다. 조붓한 오솔길을 두고 보면, ‘옛날에 이 길이 주도로였다고?’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당바위에 가보면 그런저런 의심은 사라진다. 단, 마당바위에 대한 옛 기록을 통한 사전 지식이 있을 경우에 한정한다고 덧붙여둔다. 그래서 오늘은 마당바위를 두고 기록했던 옛 사람들의 글을 사전 지식으로 소개한다.
옛 사람들의 글에 수회 또는 마당바위는 주로 한시(漢詩)에 등장한다. 외떨어졌지만 경치가 빼어나 일부러 구경왔던 사람들이 남긴 것이 아니다. 주요 교통로의 한 곳이기 때문에 오가는 길에 만난 사람과의 인연을 매개로 그 장소의 중심 소재로 마당바위가 등장한다. 먼저 보이는 것은 1521년 여름부터 1526년 봄까지 충주 목사로 재임했던 박상(朴祥, 1474~1530)의 시이다.
<연풍의 수회 언덕에서 쉬며 성지와 헤어지다 [憩延豐水回斷岡 別成之]>
北流之水綠縈回 북쪽으로 흐르는 물 푸르게 감돌고 鐵壁蒼崖窈窕開 철벽같은 푸른 벼랑 깊숙이 펼쳐져 있다 捨馬共躋松下石 말을 버리고 함께 소나무 밑의 돌에 올라 數魚頻倒掌中杯 물고기 헤아리는 동안 자주 손에 든 술잔 비운다 劉郞易播連州去 유랑(劉郎)은 파주(播州)를 바꿔 연주(連州)로 가고 召伯歸周陝土來 소백(召伯)은 주실(周室)로 돌아가느라 섬(陝)땅에서 왔다 覆韉坐談相送處 안장 내려놓고 앉아서 얘기하며 서로 전송한 곳을 從今喚作按廉臺 이제부터는 안렴대(按廉臺)라고 부르도록 하자 * 김은 경상감사로 왕도에 가서 절모(節旄)를 반납하려는 것이었고, 나는 주부(州符)를 바꿔 중원성으로 부임하는 길이었다. (金以慶尙監司 納節王都 余易州符 赴中原城) - 박상, 『눌재집』 속집 권1, 시
성지(成之)는 김극성(金克成, 1474 ~1540)의 자이다. 박상과 동갑이며 또한 동방급제한 인물로 요즘말로 하면 관직생활을 하면서 만난 둘도 없는 절친(切親) 중의 하나이다. 그런 친구를 만난 곳이 연풍 수회 언덕이었다. 김극성은 경상감사 절모를 반납하기 위해 서울 가는 길이었고, 박상은 상주목사로 임명된 지 3개월 만에 충주목사로 발령되어 충주로 가는 길이었다. 이 날의 감회를 되새기며 1년 뒤에 김극성의 시에 차운하여 읊은 박상의 시가 있다.
<김성지의 시에 차운하다 [次金成之韻]>
同榜同庚少 같은 방(榜)에 붙고 나이가 같은 사람 적었으니 幷君李我三 그대와 이군과 나 셋이다 塵埃連出處 티끌은 벼슬에 나가고 벼슬을 그만두고 하는데 따라다니고 風雨各東南 비바람으로 각각 동과 남으로 헤어졌다 杖鉞前春面 부월(鈇鉞) 짚고 지난 봄에 만나 班荊別路談 자리 같이 하여 헤어지는 길에서 이야기했다 金灘通漢水 금탄은 한수에 통하니 魚得往來諳 물고기는 오가며 소식 알릴 수 있을 것이라 - 박상, 『눌재집』 속집 권1, 시
박상이 1522년에 회상하며 ‘자리 같이 하여 헤어지는 길에서 이야기했다’는 곳이 바로 수회의 마당바위이다. 마당바위에 앉아서 바라본 풍경으로 제일 먼저 눈에 든 것이 ‘푸르게 감돌며 북쪽으로 흐르는 물’이었다. 그 물은 수안보에서 흐르는 석문천을 말함이다. 지금은 국도 확장공사 과정에서 폭파되어 마당바위가 옹색한 모양새지만, 석문천이 흐르는 굽이를 따라 앞으로 더 나아갔었을 당시를 상상하면 전혀 다른 풍광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당시는 엄혹(嚴酷)했던 때이다. 1519년에 있었던 기묘사화(己卯士禍) 여파로 살기등등한 분위기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박상은 모친상중이어서 관직에서 떠나 있었다. 상중에 있던 박상에게 의주목사로 나가있던 김극성은 선천 벼루를 선물로 보내주기도 했다. 상중이어서 답시(答詩)를 보내지 못했다고 하며, 상을 마치고 복직했을 때 김극성은 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둘이 몇 년 만에 만난 곳이 공교롭게도 수회의 마당바위이다. 아니, 그곳에서 잠시간의 반가움을 뒤로 하고 다시 헤어져야 했다. 그래서 박상은 둘 사이에 인연의 끈이 닿은 한 곳으로 마당바위를 꼽았고, 그곳을 <안렴대(按廉臺)>로 부르자고 하였다. 마당바위는 석별의 장소가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의 편찬 책임자였던 용재(慵齋) 이행(李荇, 1478~1534)의 시에서 마당바위는 석별의 장소인 동시에 재회를 예언이 실현된 장소이며 석별한 친구를 떠올리는 회억(回憶)의 장소이기도하다.
<갑자년(1504) 겨울, 내가 자진(子眞)과 함께 남쪽으로 유배될 적에 수회리(水回里)에 이르러, “그 언제나 다시 물과 함께 돌아올꼬.[何時更與水同回]”라는 시구를 지었다. 그 후 과연 방면(放免)되었고 이제 영남으로 가는 길인데, 자진이 시를 지어 작별하기를, “수회촌에 길이 지난날과 같으리.[水回村裏路如昨]” 하였다. 수회리에 이르러 보니 그 사람 자진이 생각나기에 그 구절의 글자를 나누어 운(韻)으로 삼아 시를 읊었다. 7수(七首)>
記取此老無 이 늙은이를 기억하느뇨 慇懃問流水 은근히 흐르는 물에게 묻노라 玆遊非昔行 이번 길은 지난날과는 다르지만 形勝宛然是 빼어난 경치는 완연히 그대로일세
吾詩果然驗 나의 시 과연 징험되었나니 曾與水同回 이미 물과 함께 돌아왔었지 爲向雲山道 깊은 산속 길을 향해 가노니 浮生幾往來 부생에 이곳 몇 번이나 왕래하는고
石路八九折 돌길은 여덟아홉 굽이 꺾이고 居民三四村 거주하는 백성 서너 마을이로세 往時正積雪 지난날엔 한창 눈이 쌓였더니 今日春風暄 오늘은 봄바람이 따사로이 부누나
吾友崔子眞 나의 벗이라 최자진 其人湖海士 그 사람은 호해의 선비이지 詠公靑山篇 공의 청산 편을 읊조리고 又入靑山裏 다시 청산 속으로 들어가노라 * 자진이 이별할 때 지은 시에, “청산은 일일이 가는 안장을 좇으리.[靑山一一逐征鞍]”라는 구절이 있다.
已別漢江船 이미 한강의 배에서 작별하고 獨尋水回路 홀로 수회리 길을 찾아가노라 峨峨鳥嶺高 우뚝하게 높이 솟은 새재라 爲子誦佳句 그대 위해 좋은 시구를 외노라 * “우뚝하게 높이 솟은 새재[峨峨鳥嶺高]”는 역시 자진이 남쪽으로 귀양 갈 때 지은 시구(詩句)이다.
寂寞崔夫子 적막한 최 부자여 相離闕一書 서로 이별 후 편지 한 통 없었지 因風勤問訊 풍편(風便)에 지성스레 안부 묻노니 眠食定何如 요즈음 침식(寢食)은 어떠하시오
躑躅臺前飮 척촉대 아래서 술 마시던 일 如今已成昨 지금은 어느덧 옛날이 됐구나 吾心卽若心 나의 마음이 곧 그대 마음이니 兩地應領略 서로 마음속 응당 잘 알리라 * 자진의 집에 척촉대(躑躅臺)가 있다. - 이행, 『용재집』 권7, <남유록>
1504년은 갑자사화가 있었던 때이다. 이 때 이행은 충주로 유배되었다. 충주에 유배되어서 6개월 정도 있을 때 지은 시를 <적거록(謫居錄)>으로 묶었다. 자진(子眞)은 최숙생(崔淑生, 1457~1520)의 자로 이행과의 교유가 깊었던 인물이다. 더구나 1504년의 갑자사화로 둘 다 유배되었던 사이로, 이행의 『용재집』에는 최숙생과 나눈 시가 여러 편 있다.
이행 역시 마당바위에 앉아 ‘이 늙은이를 기억하느뇨’ 라며 앞에 흐르는 석문천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청산은 일일이 가는 안장을 좇으리’라며 헤어질 때 최숙생이 지은 싯구를 떠올리며, ‘다시 청산 속으로 들어가노라’라며 자답하며 최숙생을 그리워하고 있다.
만남과 헤어짐의 장소이고, 동시에 회상의 장소가 바로 ‘마당바위’였다. 마당바위는 박상에게서 ‘안렴대’로 부르자는 사적인 약속이 있었지만, 이언적(李彦迪, 1491~1533)은 ‘솔바위(松巖)’로, 홍경모(洪敬謨, 1774~1851)는 ‘돌고개(石峴)’으로 부르고 있다.
마당바위가 있는 그곳이 영남대로의 한 길목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 바로 연풍현감을 지낸 서유돈의 선정비이다. 마당바위 바로 아래에 있는 선정비는, 마애비(磨崖碑)이다. 새재를 걷다보면 여러 개 볼 수 있는데, 마애비의 장점은 함부로 옮기거나 부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길을 지나는 누구나 보게 된다. 그러한 마애비가 마당바위 옆에 있는 것은, 마당바위가 옛날의 주도로의 한 길목이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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