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에 하늘재 넘기- 2023년 10월 14일

김희찬 | 기사입력 2024/01/25 [13:29]

시월에 하늘재 넘기- 2023년 10월 14일

김희찬 | 입력 : 2024/01/25 [13:29]

 

비 예보가 있었다. 그래도 하늘재를 넘기로 한 날인지라 충주공용버스터미널로 나갔다. 문경행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서이다. 혹시 몰라서 우산을 하나 챙겼다. 하나, 둘, 그리고 끝이다. 오늘은 나까지 셋이다. 삼인행(三人行)이 떠올랐다.

 

구름이 끼어 있어서 높푸른 가을 하늘은 기대하기 어렵다. 인원이 적기에 김밥 주문도 하지 않았다. 문경에 도착해서 주문할 생각이었다. 지난달에 문경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마트에 들렀을 때, 동희쌤은 ‘난 빵으로 할려’라셨기에 도시락 두 개만 주문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화령 터널을 빠져나온 시외버스는 문경 입구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문경 사과 축제가 열리기 때문에 아랫녘에서 올라오는 자가용 행렬에 문경 새재 갈림길 사이가 갑자기 막혔기 때문이다. 잠깐이었지만, 날씨와 상관없이 엄청나게 밀려들고 있었다.

 


문경공용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모퉁이 만두 가게는 문을 열어 놓았지만, 내리자마자 메뉴를 바꿨다. 점심을 빵으로 정하고는 터미널을 빠져나와 지난번에 주흘산을 설명하던 택시기사님이 있던 자리에 섰다. 전깃줄이 늘어져 있지만 마주보이는 주흘산(主屹山)을 사진기에 담았다. 여인의 얼굴을 닮았다는 주흘산은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요염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라며 진수쌤이 한 달 지난 맞장구를 친다.

 

마트로 향했다. 문경 읍내는 제법 활기차 보인다. 푹 고은 장국 냄새가 나는가 싶더니 금세 갓 구은 빵 내음이 훅 들어온다. 그 내음에 이끌려 홀린 듯 마트로 들어가서 물이며 빵이며, 용얭이꺼리를 샀다. 시내버스가 올 때까지 아직 30분이 남았다. 내친걸음에 옛 문경 관아가 있던 곳으로 가보기로 하고 근처에서 기다렸다가 시내버스를 타기로 했다.

 

올해 아홉 번째 들른 문경이다. 매번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오늘은 기다리지 않고 발걸음을 옮겨 주흘산 쪽으로 뻗은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문경 상리(上里)와 하리(下里)의 지적원도 작업을 해놓은 것을 가져오지 않은 게 살짝 후회됐다. 예전 문경군청이었던 읍사무소를 지나고, 순사주재소로 시작되었을 파출소를 지나니 문경중학교가 눈에 들어온다. 그 학교를 졸업한 고등학교 동기 호철이랑 진성이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널찍한 운동장에 예스런 건물 한 채가 보인다. ‘설마?’ 하면서 학교 울타리에 다가가니, 얼핏 보였던 건물은 문경 객사(客舍)다. 서대청과 객관이 온전한 문경 객사가 남아있을 줄이야! 학교 울타리 틈바구니로 사진을 찍었다. 가운데에 맞배지붕을 얹은 객관이 있고, 왼편에 반쪽짜리 팔작지붕을 인 서대청이 있다. 객관은 정면 3칸이고, 서대청은 정면에 한 칸 방과 한 칸 대청마루가 남아있는 것이 멀리서도 바로 보인다.

  

 


학교 울타리를 따라가서 객사 옆에 섰다. 객관 현판이 보인다. <冠山之館> 『동국여지승람(1530)』에 문경현의 군명(郡名)으로 ‘관문(冠文)ㆍ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ㆍ관산(冠山)ㆍ문희(聞喜)ㆍ관현(冠縣)’ 등이 보인다. 그 중에 관산을 문경 객관의 당호(堂號)로 쓴 것이다. 관산은 신라 경덕왕 때에 고친 이름이라고 한다. 문경현의 건치연혁을 보니 ‘본래는 신라의 관문현(冠文縣)이다. 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이라고도 하고, 또 관현(冠縣)이라고도 하였다. 경덕왕 때에 관산(冠山)으로 고쳐 고령군(古寧郡)에 소속시켰던 것을, 고려 때에 문희군(聞喜郡)으로 고쳤고, 현종 때에 상주(尙州)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지금의 이름[문경]으로 고쳤다. 공양왕 때에 감무(監務)로, 본조의 태종 때 현감(縣監)으로 고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옆에서 보니 객관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여섯 칸 건물이다. 서대청은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네 칸 건물인데 뒤란에는 굴뚝이 온전하다. 충주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충주 객관은 ‘중원관(中原館)’이라는 당호를 가졌었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홉 칸에 맞배지붕을 얹고 있었다. 『여지도서(1759)』에는 충주 객사의 전체 규모를 44칸으로 적었고, 『호서읍지(1870)』에는 48칸으로 적었다. 동대청은 경영루(慶迎樓)로, 서대청은 망경루(望京樓)라고 불렀다.

 

 


그 중에서 ‘경영루’는 1442년에 충주목사였던 김중성(金仲成)이 객사의 동루(東樓)를 중수하고, 정인지(鄭麟趾)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했는데, 그 때부터 ‘경영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후 1466년 (음)8월 21일에 팔도 도체찰사로서 충주를 찾은 이석형(李石亨)의 <충주동루운(忠州東樓韻)>을 시작으로 전체 17명 26수로 이어지는 차운시(次韻詩)의 전통이 있던 공간이다. 그러나 이것은 1592년의 임진왜란 이전 상황으로 경영루 대청 공간에 시재(詩才)를 다투듯 주렁주렁 걸려있었을 시판(詩板)이 모두 불에 탄 이후로는 차운시의 전통도 끊겼다. 임진왜란이 가져온 충주의 여러 변화 중의 하나로 눈여겨 볼 대목이기도 하다.

 


“한 건 했어!”라며 흥겨워하시는 동희쌤의 한 마디에 공감하며, ‘문경’ 만을 따로 한번 답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0시 50분이 되고, 터미널에서 버스가 떠날 시간이다. 떡볶이집 앞에서 기다렸다가 20-1번 문경시내버스를 탔다. 떡볶이도 다음 문경 답사 때 맛볼 것으로 예약!

 

문경읍을 빠져나오자마자 온통 누런 들녘이며 사과밭이다. 벼가 여물고 있는 들녘과 붉게 익어가는 사과밭이 눈을 사로잡는다. 여름 장마가 할퀴고 간 개울은 여기저기 복구공사 중이다. 네 번째 하늘재행이지만 매번 다른 풍경에 감탄하고 있던 사이, 하마 갈평(葛坪)에 도착했다.

 

 

갈평보건지소 앞에서 내렸다. 거기에 <갈평리 오층석탑>이라고 안내하는 아리잠잠한 돌탑 하나가 있다. 안내문에 ‘원래는 현재의 위치에서 북쪽으로 2㎞ 떨어진 관음사지(觀音寺址)에 있었으나 1936년 반출되던 것을 지역 주민들이 되찾아와 지금의 장소에 다시 세웠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문경 갈평리 오층석탑(聞慶 葛坪里 五層石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5호라고 안내하고 있다. 모순(矛盾)이 아닐까?

 

11시 30분이다. 갈평보건지소 뜰에 있는 오층석탑을 둘러보고 나오니 코스모스 한 무더기가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낀다. 정겹다. 거기부터 걷기 시작이다. 곧바로 ‘용흥초등학교’가 나온다. 토요일이고 문이 열려 있어서 운동장에 들어가 봤다. 맞은편에서 바라본 2층의 본관 건물 현관 이마에는 <솔마당 체ㆍ인ㆍ지로 미래를 준비하는 따뜻한 용흥교육>이라고 씌어 있다. 학교 운동장 한켠에 멋있는 소나무가 여러 그루 서있다. 그곳을 ‘솔마당’이라고 하는가 보다.

 


그 솔마당에 잠시 앉아 보았다. 그윽한 솔내음이 휘감아오며 편안하다. ‘이 학교의 학생은 몇 명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교실 앞에 세워진 동상을 세어보았다. 모두 4개의 동상이 있는데, 세종대왕, 유관순, 이승복, 책읽는 모자상 순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 눈에 익은 동상들인데, 이순신 장군은 보이지 않았다.

 

그곳을 나와서 갈평교 쪽으로 걸었다. 지난 여름 장마에 온통 뒤집힌 개울 바닥에 대한 복구공사가 한창이다. 물길을 내는 굴삭기 한 대가 큼지막한 바가지로 바닥을 긁고 있다. 어떤 모양으로 물길을 잡고 주변을 정리할지 궁금하지만, 내년 여름 전에는 그럴듯한 모습으로 복구될 것이다. 이번 여름 장마로 인해 문경 지역의 오미자 농사가 큰 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뒤집힌 개울 바닥을 보면서 동로(東路) 쪽에서 많이 재배하는 오미자 농사 피해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동로를 지나면 예천(醴泉)이고, 거기도 지난 여름 폭우 피해와 관련해 해병대 최 상병 사망과 관련해 중요 뉴스 지역이 된 곳이다. 그곳은 또한 하늘재로 이어지는 옛길의 주요 길목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갈평교를 건너 관음리(觀音里)로 방향을 잡는다. 개울가 사과밭에서는 은박지를 깔고 있다. 다른 곳에 비해 늦은 편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또렷하게 멀리 주흘산이 보였다. 문경에 내릴 때마다 먼저 사진기에 담았던 주흘산! 갈평에서 보이는 것도 주흘산이다. 충주의 여러 방향에서 보이는 계족산(鷄足山)처럼 문경에는 주흘산이 중심에 우뚝 서있다. 그리고 순간, 관음원(觀音院)에서 비를 피하며 지은 퇴계 이황(李滉)의 시에 들어앉은 주흘산이 이해됐다.

  

 

<관음원에서 비를 피하며[觀音院避雨] 丙午(1546, 명종 2)>

 

主屹山頭雲漠漠 주흘산 머리에 구름 잔뜩 끼었고

觀音院裏雨浪浪 관음원 속에는 비가 주룩주룩

卻憐關嶺雖重蔽 어여쁘다 관문 고개 비록 겹쳐졌으나

不隔思君一寸腸 임금 생각하는 한 마음은 막지 못하리.

- 이황, 『퇴계집 속집』 권1, 시

 

7월 23일에 하늘재를 넘으며 오층석탑과 관음원을 놓친 것이 아쉬워서 7월 29일에 혼자 하늘재를 다시 넘으며 관음원(觀音院)을 확인했었다. 그리고 관음원과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퇴계의 시를 만났다. 첫 구에 등장하는 주흘산에 어리둥절했었다. 주흘산을 상상하며 지은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갈평과 관음원에서 모두 주흘산이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퇴계가 첫 구에 구름 낀 주흘산을 보고 관음원에 내리는 빗줄기와 댓구를 삼았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걸을 때는 길 익히기에 바빴다. 두 번, 세 번 걸을 때는 각각의 대상을 살펴보기에 바빴다. 그 때도 갈평에서 보았던 산이지만, 그것이 주흘산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에야 그것이 주흘산임을 알았고, 또한 관음원에서도 주흘산이 보이는지 궁금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든, 내겐 멀리 문경의 주흘산을 되돌아보는 것이 오늘 걷기의 관심사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결국 이제껏 겨우 하나 찾아놓은 관음원과 관련한 퇴계의 <觀音院避雨>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관음2리 초입에 있는 약사여래좌상에 들렀다. 본래 거기에 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은 요구르트 두 개가 놓여 있다. 누군가 정성껏 위하는 흔적이다. 자물쇠를 채워놓지 않아서 문을 열고 인사를 드리며, 마음속으로 오늘 일정이 무탈하기를 빌어보았다.

 

 


7월에 들렀을 때는 바로 앞의 고추밭이 푸르렀는데, 오늘은 고춧대를 모두 베어 자빠뜨렸다. 여름 장마와 더위가 언제 있었냐는 식으로 가을은 성큼성큼 지나고 있다. 여름 사과를 딴 사과밭에는 사과나무만 우뚝하지만, 은박지가 깔린 사과밭에는 한참 깔내기 중인 사과가 주렁주렁 열려 유혹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이 가을 걷기가 제격인 하늘재길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관음2리 마을회관 못미처에 있는 <문경도자교육원> 옆의 정자에서 잠시 쉬었다. 관음리 길에는 쉴 수 있는 정자가 많다. 오늘은 자료집을 나누지 않았다. 준비는 했지만 출력을 할 수 없어서 1911년과 1915년에 측도된 1대 5만 문경 지형도 두 장과 1914~5년에 측량한 관음리 지적원도(1대 1,200)를 가지고 갔다. 두 장의 지형도를 정자 마룻바닥에 펴고, 그 위에 동쪽의 여우목에서 서쪽의 하늘재까지 길쭉하게 골짜기를 따라 형성된 관음리 지적원도를 올려놓았다. 세 장의 지도를 놓고 오늘 걷게 될 길에 대해 설명을 했다.

 

우리가 쉬고 있는 관음2리는 100년 전에는 없던 마을이다. 걷다가 하관음(下觀音)으로 표시된 곳의 관음리 석불입상에 들렀다가 사점리(沙店里)로 들어가서 관음원으로 이어진 지적원도에 표시된 길을 모험삼아 걷기로 했다. 관음원 자리의 반가사유상을 보고 다시 옛길을 따라 <관음정사> 표석이 서있는, ‘관음원(觀音院, 1911) 또는 관음리(觀音里, 1915)’로 표시된 지점까지 이어서 걷기로 했다. 그리고 하늘재를 넘어 미륵리까지 3시 30분쯤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설명을 곁들였다.

 

 

 

두 달 반 만에 다시 찾은 관음리에는 사과가 맛있게 익고 있다. 하지만 이상기후의 징후가 감지되기도 한다. 사과를 따낸 사과나무에 사과꽃이 활짝 핀 나무가 목격되기도 한다. 관음리 석불입상 앞에 흐르는 개울은 공사를 하던 중에 장마를 만났었다. 그 공사를 이어서 진행하고 있었고, 석불입상으로 가는 길도 바뀌어 있다.

 

바뀐 길을 따라 입구를 찾았다. 언제나처럼 입구는 따로 없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며 풀이 무성한 사과밭둑을 따라 적당한 곳을 찾았다. 매번 반복하는 불편함이다. 본래 이렇게 접근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늘재를 넘나들던 길손이 불상 앞을 지나며 기도드리던 곳이었겠지만, 한쪽 사과밭은 전기철조망을 둘러 쳤고, 한쪽 사과밭은 높은 둑에 숲이 우거져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6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매번 입구 때문에 골탕먹는 곳이기도 하다. 그 앞의 공사 상황으로 보아 개울가로 새로 길이 닦일 것인데, 그 참에 석불입상 입구도 정비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입구가 따로 없어서 애매한 곳이 석불입상이라면, 길에서 보아 소나무 숲에 가려서 마을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곳이 사점리(沙店里)이다. 지적원도에도 제법 큰 마을로 표시된 사점리는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사기실, 사기소(沙器所), 사기막(沙器幕), 사기점(沙器店), 사기리(沙器里)’ 등과 궤를 같이하는 곳이다.

 

 

 

관음리 골짜기에는 요(窯)가 줄지어 있다. 하늘재를 경계로 양편 골짜기에 일반이 쓰던 막사발을 굽던 가마터가 많은데, 그것과 직접 관련된 마을이 사점리임을 짐작하게 한다. 사점리는 막사발을 굽던 시절에 중심 마을이었을 것이다.

 

7월에는 사점리 입구의 솔숲까지만 갔다가 되돌아 나와 아스팔트 포장길을 걸었다. 오늘은 입구의 솔숲을 지나 개울을 건너 마을길을 따라 걸었다. 마을을 지나 이어진 예자한칸(약 2m)의 옛길은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다. 사과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지적원도에 표시된 관음원까지 이어진 길이 아직 남아있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그것은 기우(杞憂)였다. 사점리를 지나 이어진 옛길은 사과밭에서 사과밭으로 관음원까지 계속됐고, 관음원에서 관음1리까지도 사과밭 사이로 조붓한 옛길을 사이에 두고 계속된다. 가을걷이도 그렇지만, 가을길 걷기에 정말 맞춤맞은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에 사점리부터 관음1리까지 이어진 동막길은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관음원에 이르는 길로 이만한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546년에 퇴계도 이 길을 따라 관음원에 도착해 비를 피했을 것이다. 7월 29일에 드디어 관음원 자리를 확인했지만, 너무 더워서 대충대충 훑어만 보았다. 오늘은 거기에서 빵으로 점심을 때우고 그곳의 유일한 증거인 반가사유상과 한참을 이야기했다. 동희쌤의 셔터 누르는 속도가 빨라졌고, 진수쌤도 핸드폰 카메라로 열심히 반가사유상을 담았다.

 


비가 내릴 것 같은 날씨였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만 찍어야지, 불상 닳어.”라는 농이 농익은 동희쌤의 재치가 순간 발휘됐다. 높푸른 가을 하늘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구름에 가린 해가 살짝살짝 내비칠 때에 반가사유상의 명암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잠깐 볕이 들 때 선명하게 드러나는 윤곽을 놓칠라 연신 셔터를 눌렀다.

 


방향을 달리하며 보이는 표정 변화가 재밌다. 무슨 생각에 골똘할까? 여기가 관음리의 관음원이고, 그 관음원의 주인이 반가사유상이라면, 하늘재 너머에 미륵리에는 미륵원(彌勒院)이 있을 법하다. 하지만 미륵원은 신니면 원평리에 있다.

 


1196년 (음)9월 19일 아침에 문경의 유곡역(幽谷驛)에서 출발한 이규보(李奎報)는 요성역(聊城驛, 문경읍 요성리)에서 쉬며 점심을 먹고 화봉원(華封院, 속칭 초곡원(草谷院)으로 문경현 북쪽 4리)에 들렀다가 저녁에 미륵원(彌勒院)에 도착해 낯모르는 주지의 환대를 받았다.

 

<19일에 미륵원(彌勒院)에서 자는데 본래 모르는 중이었으나 주찬을 베풀고 위로하므로 시로 사례하다. [十九日. 宿彌勒院. 有僧素所未識, 置酒饌慰訊, 以詩謝之]>

 

稅駕入古院 멍에를 풀고 오래된 원에 들어가니

燥吻無由澆 마른 입술을 축일 길이 없구려

詩肩秋山聳 시인의 어깨는 가을 산처럼 솟고

旅恨風旌搖 나그네 한은 펄럭이는 깃발처럼 흔들리네

吾師舊未識 우리 대사를 예전에 알지 못하였는데

欣然肯相邀 기쁘게 맞이하여 주누나

桂酒酌碧香 푸른 빛 계피주 잔질하여 향기롭고

霜梨剝紅消 가을 배의 붉은 빛은 깎여서 사라지네

已療靈輒飢 이미 영첩의 주린 것을 치료하고

復慰相如痟 다시 상여의 소갈증을 위로하였네

君看今人交 그대는 지금 사람들의 사귀는 것을 보라

有似秋雲飄 나부끼는 가을 구름과 같다네

膠漆誓昨日 어제는 한마음으로 찰떡같이 맹세하고

胡越視今朝 오늘은 서로 원수처럼 본다네

多師有古風 장하다 대사는 예전 풍도가 있어

名與遠公超 이름이 원공과 함께 드러나리

遇士雖非素 본래 아는 사이 아닌 선비를 만났더라도

意合不謂遼 뜻이 합하면 멀게 여기지 않네

見我如舊執 나를 보고는 예전 친구와 같이 여겨

殷勤訊無憀 은근하게 무료함을 묻는구나

此意何以報 이 뜻을 어떻게 갚으랴

愧無答瓊瑤 좋은 시로 보답하지 못함이 부끄럽네

-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권6, 고율시

 

충주의 신니면 원평리에 있었던 미륵원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규보는 다음날 여주 고향으로 돌아가는 노정을 시로 남겼다.

 

처음에 이 시를 접하며 요성역에 들렀던 것에 착안하여 이규보가 하늘재를 넘었을 것으로 속단했었다. 그러나 그는 요성역을 지나 새재 초입에 있었던 화봉원에 들렀다. 새재를 넘어 닿은 곳이 미륵원으로 꽤 먼 거리이다.

 

관음리의 관음원 반가사유상은 서쪽을 향하고 있다. 신니면 원평리의 미륵원 미륵불은 동쪽을 향하고 있다. 두 기의 불상을 연결시키기에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상상해보면 두 불상은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지만 분명히 마주보고 있다. 그 중간쯤이 충주가 된다.

 

다시 하나를 더 상상해보면, 충주에서 보이는 동쪽에는 계족산(鷄足山)이 있고, 서쪽 끝에는 가섭산(迦葉山)이 있다. 아난존자(阿難尊者)의 수도처였다는 계족산과 가섭존자(迦葉尊者)의 이름을 딴 가섭산이 충주의 좌우에 놓인 형국이다. 하늘재를 가운데에 두고 관음리와 미륵리가 마주대하고, 관음원의 반가사유상과 미륵원의 미륵불이 마주보고 있다. 또한 계족산과 가섭산이 마주보며 충주를 중간에 두고 있다. 그렇다면 중원(中原)의 중심인 충주는 곧 석가모니가 된다.

 

그리고 충주의 미륵리나 원평리나 숭선리에 있는 돌부처는 모두 미륵불로 돌갓을 머리에 이고 있다. 또한 원평리나 숭선리의 미륵불은 충주를 바라보고 있다.

 

어거지 같은 상상이지만, 불교가 들어온 이후 삼국의 각축장이 되었고, 통일신라시대의 중원, 고려시대의 충주는 온통 불교가 대세였던 시기이다. 기준을 어디에 두고 보는가에 따라 해석은 달라질 수 있지만, 분명히 그 중심에는 불교적인 세계관과 지리인식이 자리한다. 조선시대가 되면서 불교의 세가 꺾였고, 충주는 유교 중심의 도시로 변모했지만, 그 이전 상황에 대해 불교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서 올 겨울에 충주의 폐사지를 찾아보고 그 시기의 충주, 미륵세계의 충주에 대해 생각해 볼 계획이다.

 

뒤에서 보면 마치 목이 부러진 돌부처 모양을 하고 있는 듯한 반가사유상과 짝을 이뤘던 갈평보건지소 뜰에 있는 오층석탑의 원위치가 여기라고 한다. 반가사유상 앞은 전주 이씨의 묘역으로 바뀌었지만, 1546년에 비를 피해 관음원을 찾았던 퇴계의 시에서 온전했던 모습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오늘 하늘재 걷기에서 다시 만난 반가사유상은 참으로 많은 것을 사유(思惟)케 한다.

 


반가사유상을 뒤로 하고 지적원도 모양대로 남아있는 작은 삼거리를 지나 다시 옛길을 따라 관음정사 표석까지 걸었다. 여름에 화려했던 꽃사과 나무는 알알이 열렸던 사과를 떨구고 사과꽃이 폈다. 신기하다 못해 이상한 풍경을 뒤로하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거기부터 하늘재까지는 2단의 오르막길이다. 안내판을 보면 그곳에 3차로로 넓혀진 길 옆이 주차장으로 표시되어 있다. 하늘재를 두고 하늘재 옛길을 복원하고 있는 문경시의 밑그림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관음원을 비롯한 역사 유적에 대한 정비 사업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2020년에 찾았을 때, 문경시는 관음리의 하늘재 복원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는 흙을 퍼다 깎아낸 산자락을 메워 경사면을 만들고 나무를 심었다. 3년이 지난 지금 그곳은 제법 그럴듯한 모양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그 바로 아래에 주차장을 새로 만들고 편의시설을 갖추었다. 매년 변해가는 관음리의 하늘재 지역을 계속 눈여겨보아야 할 것 같다.

 

 

잠깐 걸어서 하늘재 고갯마루에 섰다. 예전 같으면 거기 있던 산장에서 도토리묵에 막걸리 한 됫박을 시켜놓고 목을 축였을 것이다. 문경시에서 2001년에 세운 <계립령 유허비>와 산림청에서 2009년에 세운 <백두대간 하늘재> 표지석이 마주 보며 서있다. 표지석은 위의 전망대에 세웠던 것인데, 지금은 내려와 있다.

 

 

마침 그곳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한 무리의 사람이 있었다. 썬글라스를 이마에 얹은 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한 사람! 박군이다. 서로 사진 찍어주기 품앗이를 하고 문경읍에서 거기까지 지고 간 물병을 나누어주곤 미륵리의 월악산 국립공원 하늘재길로 넘어선다.

 


경계를 넘으려는 순간, 시 한 수가 생각났다.

 

<대원령에 올라[登大院嶺]>

* 경산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自京山還都]

 

要衝人不斷 요충이라서 사람의 자취 끊이지 않는 곳

石路自嶇嶔 돌길이라서 워낙 기구하고 험준하다

北望天文近 바라보는 북쪽은 천문이 가깝고

南踰地勢深 넘어온 남쪽은 지세가 깊다

卸鞍依澗曲 말안장 내려 시내 굽이에 기대기도 하고

解帶臥松陰 허리띠 풀고서 솔 그늘에 눕기도 하고

屑屑吾行役 구질구질한 나의 이 발길이

時還愧此心 때때로 마음이 또 부끄러우리

- 이숭인, 『도은집』 권2, 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서기 156년부터 기록된 계립령(鷄立嶺)을 지금은 하늘재라고 부른다. 또는 대원령(大院嶺), 한원령(限院嶺), 한훤령(寒暄嶺)으로 불리기도 했다. 오랜 세월 동안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가 되었고, 관음 세계와 미륵 세계를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1392년에 조선이 개국한 직후에 살해당한 이숭인(李崇仁)은 1390년 11월부터 만 1년을 충주에서 머물렀다. 그 시기에 그는 충주에서 이런 시를 짓기도 했다.

 

<중원 잡제(中原雜題)>

 

天淨雲高秋氣新 하늘 맑고 구름 높고 가을 기운 신선한데

倦游無處可怡神 벼슬살이 싫증나도 심신을 쉴 곳이 없네

行過萬里仍爲客 만리 길 지나왔어도 여전히 나그네 신세

坐愛南山不負人 앉아서 남산을 사랑한다네, 등지지 않으니까.

 

千峯廣利遠來過 천봉 광리 스님이 먼 곳에서 찾아와

列案珍羞厚意多 진수성찬 차려주며 후하게 대접하네

想得分從香積界 아마도 향적 세계에서 나눠 받았을 이 음식

深慙不是老維摩 늙은 유마가 아니라서 부끄럽기 짝이 없네

 

靑山環拱水縈回 청산이 에워싸 호위하고 물이 굽이도는 곳

布襪芒鞋幾往來 무명 버선에 짚신 신고 얼마나 왕래하였던가

三十二年如一夢 32년의 세월이 한바탕 꿈 같은데

夢中猶記鳳凰臺 꿈속에 그래도 봉황대가 기억나네

 

人世誰非夢幻身 인간 세상 그 누군들 몽환의 신세가 아니랴만

却從流落作悲辛 슬프고 쓰린 떠돌이 생활 유독 겪어야 하는지

何當共聽松風坐 어떡하면 함께 앉아 솔바람 소리 들으면서

話盡三生石上因 삼생석의 인연에 대해 모두 얘기 나눠볼까

- 이숭인, 『도은집』 권3, 시

 

고려와 조선의 운명이 갈린 것처럼 이숭인의 운명도 갈렸고, 하늘재의 운명도 갈리지 않았을까? 문경 새재가 1592년 6월 7일에 18,000여명의 왜군이 넘은 곳이라면, 이곳 하늘재는 1250년대에 매년 침략했던 몽고군이 경상도 지역을 유린하기 위해 넘던 길목이었다. 그래서 경주의 황룡사 9층목탑이 불탔고, 매년 몽고군이 쓸고 지나간 경상도 지역의 여러 고을은 쑥대밭이 되었다.[所經州郡 皆爲煨燼] 그런 중에 1255년 (음)10월에는 대원령(大院嶺) 전투를 기록하였다. 그 전투에서 충주의 별초(別抄)는 매복 작전을 통해 1,000여명의 몽고군을 죽였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하늘재를 넘어 미륵리로 이어진 골짜기가 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숲이 울창한 미륵리 하늘재길을 걸어 내려오니 벌써 4시다.

 

 

 

3시 30분대에 시내버스가 있고, 4시 40분대에 또 한 대의 시내버스가 있는 것으로 아침에 보고 왔지만, 14시 40분을 4시로 잘못 본 것이었다. 미륵리 사지를 지나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년 보수공사 끝에 깨끗하게 드러난 대원사(大院寺)를 둘러보지 않았다. 시간에 쫓기기도 했고, 또는 지난번 정기모임 때에 들렀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산을 받치고 식당가로 나오는데 노랫소리가 요란하다. 끝자락 모퉁이를 돌며 있는 솔밭을 ‘말무덤’이라고 부른다. 거기에서 하늘재를 되돌아 기웃거렸지만, 나무에 가려 고개는 보이지 않았다.

 

 

건설부 국립지리원에서 발간한 『지명유래집(地名由來集)(1987)』에는 ‘말무덤’의 유래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여러 곳에 전적지가 있는 것처럼 말무덤이 꽤 많이 있다. 이들은 마을 이름이 되기도 하고, 묘 이름, 골짜기, 등성이, 산 이름이 되기도 한다.

 

또한 지방에 따라 그곳에 사투리까지 담고 있다. 곧, 말무덤, 몰무덤, 말무더미, 말매등, 몰무디미, 몰무듬 들로 다양하다.

 

말을 묻은 무덤이라고 하나, 많은 송장을 무리로 묻은 무덤이라고 풀어 볼 수도 있겠다. 어떠하든지 매우 큰 무덤, 산처럼 큰 무덤에 붙여진 이름이다. 무리로 묻은 무덤이라고 하면 그곳은 바로 옛날 싸움터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라고 정리하며 전국에 있는 말무덤의 지명 사례 여섯을 들고 있다.

 

미륵리에서 ‘말무덤’으로 부르는 그곳은 소나무 숲이다. 그렇다고 커다란 봉분이 있는 것도 아니며, 두 기의 작은 무덤 정도가 있다. 그럼에도 말무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1255년에 있었던 대원령 전투에서 1,000여명의 몽고군을 무찌르는 과정에서 몽고군이 타던 말이 죽었고, 그 말을 묻었던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싸움터’였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곳으로 1250년대에 연례행사처럼 몽고군의 고려 침공이 있을 때마다 그들의 주된 이동경로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4월 6일 한식날에 하늘재를 넘고 늦은 점심을 먹었던 그곳에 들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더니 점점 거세졌다. 감자전에 막걸리 한 됫박을 시켜놓고 5시 40분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드디어 6개월 만에 주인이 개밥을 끓이다가 태워먹어서 한식날 점심을 굶은 ‘대박이’를 만나기도 했다.

 

비소식이 있었지만, 하늘재 넘기를 마칠 때까지 비는 내리지 않았다. 문경읍 갈평리에서 시작해 관음리를 걸으며 사점리에서 옛길을 따라 사과밭 사잇길을 걸었다. 길의 온전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지난 여름 더위에 지쳐 모든 일정을 접기로 했던 곳이기도 하다. 천 번 이상의 여름 더위를 이겨냈을 관음원의 반가사유상과 다시 만나 깊은 속생각을 하기도 했다.

 

문경 새재가 1592년의 임진왜란과 관련해 충주에 직접적인 상처를 남긴 길이었다면, 하늘재는 1250년대에 매년 침공해온 몽고군이 영남으로 진출하던 주된 통로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그때의 충주는 굳건했다.

 

350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진 큰 전쟁에서 운명을 달리하는 충주의 모습을 상상해 봤다. 승전의 공으로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기도 했고, 패전의 과로 충청감영을 옮기기도 했다. 그 중간에 고려의 충주에서 조선의 충주로 바뀌는 상황이 있었고, 관음과 미륵의 불교세계는 깨져나갔다. 그 변화의 순간순간을 겪으며 운명을 갈랐던 충주의 오늘은 어떤 모습인가? 사과가 맛있게 익으며 유혹하는 관음리 하늘재 옛길에 가을 추억 하나를 남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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