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수안보온천 온정원(溫井院), 발굴조사가 필요하다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4/01/25 [15:51]

135. 수안보온천 온정원(溫井院), 발굴조사가 필요하다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4/01/25 [15:51]

 

수안보온천은 전국에서도 대표적인 온천이다. 온천의 존재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 지리지에서부터 보인다. 1018년(고려, 현종 9년)에 장연현(長延縣)으로 명명되면서 그 연혁을 기술하고, 끝에 온천의 존재를 부기했다.

 

장연현(長延縣)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상모현(上芼縣)으로, 현종(顯宗) 9년(1018)에 지금 이름으로 부르고, 〈충주목에〉 내속(來屬)하였다. 온천(溫泉)이 있다. [長延縣本高句麗上芼縣. 顯宗九年, 稱今名, 來屬. 有溫泉.] (『고려사』 권56, 지(志) 권제10, 지리1, 양광도 충주목 장연현조)

 

온천의 존재는 기록된 연대 훨씬 이전부터 알려졌을 것으로 보이고, 다만 기록 과정에서 기사로 채택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온천(溫泉) 또는 온정(溫井)으로 기록되며, 연풍온천(延豊溫泉), 연풍온정(延豊溫井), 안부온천(安富溫泉), 안부온정(安富溫井), 안부역온천(安富驛溫泉), 안보온천(安保溫泉), 수안보에 있는 온천(水安保地溫泉)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온정원(溫井院)이 온정 곁에 있다.(溫井院 在溫井傍)’고 기록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온천은 현[연풍현] 북쪽 20리 안부역 서쪽에 있고, 집 9칸이 있다.(溫泉 [在縣北二十里. 安富驛 西, 有屋九間.])’고 하여 온정원 건물의 규모를 알려주고 있다.

 

원(院)은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여관이었다. 미륵리석불입상이 있는 미륵사지의 경우 미륵대원(彌勒大院)이란 이름의 대규모 부지가 존재한다. 문경에서 하늘재를 넘어와 만나는 첫 여관인 셈이다.

 

또한 문경 새재의 1관문과 2관문 중간에 조령원터(鳥嶺院址)가 있다.(鳥嶺院 : 在鳥嶺背東. <신증> 제29권 경상도 문경현 역원조)3관문을 지나 충청도 땅으로 접어들면 소조령을 넘어 안부역을 지나 수안보에 닿는다. 바로 그곳에 온정원이 있었던 것으로 소백산맥 험준한 고개를 넘어온 도보 여행ㆍ출장자들의 쉴 곳이었다. 또는 산짐승이 출몰하는 험준한 새재를 밤에 넘기 두려워 하룻밤 쉬던 곳이 곧 온정원이었다.

 

온정원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위치에 대해서도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수안보온천에 대해 오랫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온천사 정리에 힘써온 조일환 선생이 온정원의 위치를 추정한 바 있다.

 

‘이 온정원의 위치는 …(중략)… 수안보에서 출생하고 수안보에서 살고 있는 오용근ㆍ노윤택 씨의 증언에 따르면 석현(石峴, 일명 돌고개) 근방으로 추정된다. 이 돌고개에는 상당히 큰 느티나무와 예로부터 존속했다고 전해지는 두 채의 큰 주막이 있었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곳에서 쉬어가고 유숙했다고 하는데, 이 돌고개는 위치상 「여지도서」의 기록내용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온정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고, 대개의 원(院)이 주막의 형태를 취했으므로 이곳에 온정원이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수안보에 살으리랏다(수안보면지)』(수안보면지편찬위원회, 2011. p.84.)

 

<신증>과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과는 거리가 먼 추정으로 보인다. 온정원의 상황에 대한 기록이 하나 있다.

 

안보온천에서 목욕하다(浴安保溫泉)

 

※ 병신년(1476)에 큰 비가 여러 달을 계속 내려 냇물이 범람하여 온천을 충격하니, 해사(廨舍)의 판추(板甃) 또한 무너져서 마침내 냇물과 서로 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후로는 물이 매우 차가워서 목욕을 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온천 곁에 거주한 백성이 10여 호가 있었는데, 지금은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집수리하는 사람에게 물으니, 한 노인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세속에서 온 재상 등의 침탈로 인하여 모두 다른 고을로 유랑하여 옮겨 갔다.” 하였다. (丙申年. 大雨連月. 川水泛溢 衝激溫井 廨舍板甃亦潰 遂與川水通. 自是水甚冷 不堪沐浴. 舊時 泉傍居民十餘戶 今無一人. 問之修葺者 一老翁歎息云 “爲俗來宰相等侵牟, 皆流徙他邑.”)

 

원려최괴정장인(垣廬摧壞井將堙) 담장과 집 무너지고 샘은 곧 막히게 되었는데

 

수즙연풍리수인(修葺延豐吏數人) 집수리하는 이는 연풍 아전 몇 사람뿐이다

 

병객요제신상구(病客要除身上垢) 병객은 몸에 낀 때나 벗길 요량이지만

 

탕원견협독중신(湯源見脅瀆中神) 온천 근원은 도랑 귀신의 위협을 받네그려

 

혹의후온용고화(或疑后媼慵敲火) 혹은 땅귀신 할매가 불 잘 안 지핀다 의심하고

 

역도천공해애민(亦道天公解愛民) 또한 하늘이 백성 사랑할 줄 안다고 말하기도

 

십실촌금류사진(十室村今流徙盡) 열 집 마을이 지금은 다 흩어지고 없는지라

 

노옹욕어갱첨건(老翁欲語更沾巾) 노인이 그걸 말하려다 다시 수건 적시네

 

- 김종직, 『점필재집(佔畢齋集』 시집 권 12

 

1476년 추석 밑의 수안보 상황에 대한 기록이다. 선산부사를 제수받고 부임길에 수안보온천에 들른 김종직은 당시의 참상을 기록하며 시를 썼다. 여름 장마로 인해 석문천이 범람했고, 그 여파로 온정원과 온정, 그리고 온정 주변의 10여 채 민가가 쓸려나갔다.

 

시주(詩註)에서 온정원을 해사(廨舍)로 썼다. 공공건물이다. 판추(板甃)가 무너졌다고 했는데, 이것은 온정원 서쪽에 석문천과 나란했던 돌담을 말한다. 석문천의 범람으로 온정원 서쪽 담장이 무너지고, 범람한 물은 그대로 흘러 온정을 덮쳤다. 토사로 온정이 묻힌 상황이다.

 

수해복구 현장을 목격한 김종직의 눈에,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연풍현의 아전 몇 사람 뿐이다. 근처에 있던 노인에게 사정을 물으니 “세속에서 온 재상 등의 침탈로 인하여 모두 다른 고을로 유랑하여 옮겨 갔다.”고 하며 마을 사람들이 유랑을 떠난 이유와 사실을 들려줬다. 그리고 노인은 눈시울을 적셨다.

 

▲ 1914년 지적원도상의 211번지  

 

▲ 온천리 211번지의 남측 대지 노출 사진. 재건축 관계로 온정원 추정지의 절반 이상이 노출된 상태이다. (2020년 1월 23일 촬영)

 

온정 곁에 9칸 집으로 있던 온정원은 일단 돌고개와는 거리가 멀다. 1914년에 측량된 지적원도를 보면 온천리 211번지가 온정 곁에 단일필지이고, 대지이며, 국유지로 기록돼 있다.

 

현재의 수안보온천랜드가 있는 자리가 온정이 있던 곳이다. 길 건너편의 수안보볼링장을 시작으로 물탕 2길을 건너 청운식당, 온천부부식당, (구)부림파크가 있던 부지가 본래 한 필지로 211번지이다. 최근에 부림파크 건물을 헐었다. 너른 공터가 드러났는데, 이 곳이 바로 온정원의 중심공간으로 추정된다.

 

현행법상 강제로 발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기본적으로 온정원에 대한 조사가 없었고, 따라서 문화재적인 가치 판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고 하더라도 발굴비용은 건축주가 부담해야 한다. 그 기간 또한 마냥 미뤄질 수 있어서 건축주 입장에서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감당할 이유가 없다. 혹시라도 건축 공사를 진행하면서 해당 부지에서 주춧돌 몇 개라도 나오고, 그것을 누군가 발견하여 당국에 신고할 경우 긴급구제발굴이 이루어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비용과 시간은 고스란히 건축주의 몫이다.

 

수안보온천에 대한 긍지와 가치는 아직 저평가되어 있다. 특히 역사적 맥락에서의 위상 정립은 수안보온천의 재활성화를 위해서 고구되어야 할 영역이다. 그런 측면에서 수안보온천에 있었던 온정원의 조사 연구가 필요하다. 무슨 뾰족한 수는 없지만 공공의 영역에서 비용을 부담하여 발굴조사를 진행하는 방법을 찾아주길 희망한다. 온양온천이 조선시대 여러 왕의 행차로 행궁(行宮) 유적이 있다면, 수안보온천에는 온정원(溫井院) 유적을 찾아 활용하는 방법을 찾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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