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응(權泰應, 1918~1951) 하면 ‘감자꽃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둘은 짝을 이뤄 우리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그래서 충주에 사는 사람은 권태응과 감자꽃을 한몸처럼 기억한다. 그리고 탄금대에 있는 감자꽃 노래비 또한 상식처럼 알고 있다. 그럼에도 권태응을, 아니 권태응을 추억하며 기억하는 비석을 따라 걷는 이유가 있다.
1월 27일 아침. <千里忠州>를 연재하면서 매달 한 번씩 걷는 모임도 이름을 같이 하였다. 그리고 올 들어 첫 걷기를 1월 13일에 가졌고, 다시 2월 모임을 알리면서 번개모임을 제안했다. 바로 그날이다. 그래서 번외 원고로 정리해 싣는다.
한 주 내내 영하로 떨어진 날씨. 추워서 누가 나올까 걱정했지만, 15명이 같이 걸었다.(중간에 일정 때문에 빠진 사람도 있지만…) 그날 걸었던 곳은 <교현초 → 충주문학관(구, 시립도서관) → 충주 향교 → 풀무고개(교현초, 향교, 경찰서 뒤에 있는 야현리) → 연원역 자리(연원시장 부근) → 충주 여제단 자리 → 쇠지울[金堤] → 권태응 묘소(파라다이스 웨딩홀 주차장 옆) → 능암리(양정공사우) → 칠금리 농협 창고 → 생가터 → 탄금대>로 5시간 반이 걸렸다. 그간 알게 모르게 감자꽃 또는 권태응의 시를 새긴 비석이 5개나 되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에 놓고, 가는 길에 둘러볼 곳을 더한 결과다. 가는 데마다 이야기가 보태지다 보니 자연 시간도 늘어졌다.
교현초 운동장이 모이는 곳이었고, 조회대 옆에 감자꽃 시비가 하나 서 있다. 권태응은 교현초등학교 졸업생으로 동창회 차원에서 비를 세워 기억하고, 모교에서 자라는 새싹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런데 현재 교현초는 1933년에 옮긴 자리이다. 권태응이 교현초를 다닐 때는 성내동의 한국통신 뒤에 학교가 있었다. 몇 가지 덧말을 붙이곤 옛 시립도서관에 들어선 <충주문학관>을 찾았다.
맘껏, 실컷 구경하라고 해놓곤 한 바퀴 빙 둘러 나왔다. 문학관 바로 앞에는 <우송 김태길 문학비>가 까맣게 서 있다. 유명한 철학자이며 수필가로 알려져 있지만, 충주 사람들에게 낯선 인물이다. 1995년에 창작과비평사에서 권태응 동시집 <감자꽃>을 새로 출판할 때, 뒤에 붙인 해설은 <터 없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충주가 고향인 문학평론가 유종호 교수가 썼다. 김태길은 1996년에 <농촌과 민족을 향한 순진한 사랑, 「감자꽃」>이라는 제목의 서평을 쓰면서, 첫 문장을 ‘권태응 시인은 나의 외육촌(外六寸)형이다.’로 시작한다. 권태응과 김태길은 피붙이이지만, 비석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다.
발길을 옮겨 충주 향교로 갔다. 교현초등학교가 1896년에 ‘소학교령’에 의해 개교한 충청북도의 근대식 첫 공립학교라면, 충주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의 공립학교라고 할 수 있다. 교현초가 충청북도공립소학교로 개교하기 직전에 충주 향교는 을미의병과 관병ㆍ일본군과의 교전 중에 화재로 불탔던 이력이 있다. 마치 신ㆍ구의 교체처럼 1896년을 기점으로 운명이 바뀌는 교묘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는데, 화재에서 살아남은 행랑의 솟을대문을 구경시키는 것으로 대신했다.
향교 옆으로 난 소방도로를 버려두고 좁다란 옛길, 골목을 빠져나와 뒷마을 야현으로 갔다. 그곳은 권태응보다 2년 선배인 시인 정호승(본명 영택, 1916~1950)이 나고 자라며 시인으로 성장한 곳이다. 쓰레기분리수거장으로 변한 ‘풀무고개’를 이야기하며, 1939년에 출판된 충주 사람의 첫 시집인 <모밀꽃>의 한 페이지를 열어 읽어주었다. 그리고 옛 길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골목을 따라 걸으며 ‘야현(冶峴)’이 아닌 ‘교동길’로 도배된 모습을 보았다. 골목을 따라 잠시 걸으니 벌써 고북문사거리이다. 그곳은 예전에 충주 외성(外城)의 북문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임을 설명하고 연수동으로 걸었다. 그 길은 북진 나루를 건너 연원역을 지나 충주 읍성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연수동주민세터 앞에 있는 연원찰방 이승렬 애휼비(愛恤碑)와 연원역 자랑비를 보고, 연원시장을 기나 옛 연원역(連原驛) 자리에 섰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아파트 숲이다. 그러나 옛 연원역은 그렇게 갇혀있을 곳이 아니다. 충북북부지역으로 칭하는 충주ㆍ제천ㆍ단양ㆍ괴산ㆍ음성 등을 연결하는 주요 지점, 길목에 있었던 14개 역을 속역으로 두었던 대단한 곳이다. 그 길을 연원도(連原道)로 불렀다. 그나마 남아있는 골목을 훑으며 삼각형의 섬 모양으로 남아있는 여제단(厲祭壇) 터 옆에 잠시 서서 여제단과 여제 등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배고픈 귀신, 제삿밥 못 얻어먹는 귀신, 역병을 옮긴다는 역귀들을 먼저 위무하고 일행은 고픈 배를 채웠다.
시청 앞을 지나 몇 년 전 길을 내며 1/3로 작아진 쇠지울[금제]를 보고 고라니만 다니는 길을 따라 권태응 묘소에 들렀다. 한 겨울 맵찬 바람에 묘갈은 기울어 있고, 반대편에는 감자꽃을 새긴 비석이 있다. 일행 중에 <강아지똥> 그림책 작가인 정승각 형이 있어서, 권태응 문학제 초창기에 있었던 일련의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오전 내내 얼굴을 감추었던 햇살이 퍼져서 오후 걷기는 따뜻했다.
능바우로 향하며 고속철도 때문에 폐쇄된 건널목을 대신해 놓인 육교와 마주섰다. 길을 걷다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우연한 경험도 시켜줬다. 오래된 마을에 남아있는 골목, 그 골목을 따라 능바우의 터주대감인 양정공사우 앞에 섰다. 오래된 향나무 한 그루가 그 세월을 이야기하는 듯 일행을 반겨줬다.
능바우를 나와 옻갓[칠금리]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었다. 능바우나 옻갓 모두 안동 권씨 집성촌이었던 곳이다. 권태응이 나고 자란 곳이 옻갓이다. 지난 가을 답사 때에 찾지 못했던 비석 하나를 왕갈비탕집 옆의 농협 창고 앞에서 찾았다. 거기에는 <재밌는 집이름>이라는 동시를 새겼다. 옻갓으로 시집온 여인들의 고향에 따라 붙여진 이름, 나는 짓궂게 ‘제천댁, 부산댁, 진해댁, 충주댁’을 부르며 재밌는 집이름을 일행 중 여인들에게 응용하기도 했다.
다음은 네 번째 비석이 있는 생가터라는 곳이다. 농협 창고 건물에서 바로 왼쪽으로 들어서면 넓은 집터에 한옥과 양옥이 나란히 있는 집이 있다. 권승지로 유명했던 권태응의 둘째 증조할아버지 집이고. 육촌형 권태성씨가 나서 자랐고, 생을 막음한 곳이다. 또한 거기는 권태응이 나서 여덟 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엄밀히 따지면 생가터는 바로 거기이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며 생가터라고 하여 비석을 세운 곳에 닿았다.
생가터에 세운 비석은 다른 곳과 달리 크기도 크지만, 뒷면에 감자꽃 악보를 새겨놓았다. 그 비석과 이웃해 사는 옆집 개가 컹컹, 갈 때마다 짖는다. 다음 번에 들르기 전에는 옆집 개에게 악보 읽는 방법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지막 목적지인 탄금대에 올랐다.
동쪽 강둑과 이어진 계단을 따라 올랐다. 120개가 넘는 계단을 세며 올랐지만, 중간에 숨이 차서 까먹었다. 숨을 고르며 잠시 걸어 노래비 앞에 섰다. 1968년에 세운 탄금대의 감자꽃 노래비. 처음에는 주물로 뜬 동판으로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누군가 그 동판을 훔쳐갔고, 그래서 한동안 노래비 주위에는 가시철조망을 둘러 사람의 접근을 막았었다.
1940년에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폐결핵에 걸린 권태응 선생은 전쟁 중인 1951년에 폐결핵 약을 구하지 못해 병세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폐병 환자가 되어 고향에 돌아온 육촌동생 권태응에게, ‘그래 뭘 하고 싶니?’라며 권태성 선생은 물어봤단다. ‘형님, 저는 야학을 하고 싶어요.’라는 대답에 ‘석유지름과 장작은 내가 대 주마.’라며 병약한 동생의 유언같은 한 마디를 소원으로 듣고 야학을 지원해 주었다며 권태성 선생은 내게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노래비 동판 도난 사건을 이야기하며, 윤석중 선생이 노래비 건립을 계획하면서 아이들이 마음대로 만지고, 올라타며 다가올 수 있도록 울타리 없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었다.
<감자꽃>
자주 꽃 핀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제목까지 다해서 40자가 안되는 짧은 시 한 편이 우리들 기억속에, 가슴속에 꽃피는 이유는 뭘까? 번개 모임을 계획하며 이런 생각을 했었다. 작고한 문인에 대한 충주의 기억법이 참으로 별다르다고.
1월 28일 아침에는 신니면 원평리 미륵불(홍구범) → 용원(이무영) → 신의실(이흡) → 덕고개를 넘어 노은 입장(신경림)까지 걸었다. 다른 작가를 기억하는 현장을 보며 다시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충주문학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충주문학관>은 충주의 문인, 문학을 이야기하며 이해할 수 있는 첫 공간이며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충주문학관>은 하늘나라 납골당에 들어서는 것보다 어둡고 침침하다.
2024년 충주는 문화도시의 한 곳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문화의 한 축이 되는 문학공간은 진작에 만들어 놓고 방치하고 있다. 햇볕 들지 않는 공간에 방치된 충주는 어쩌면 병이 깊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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