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바위에 들렀다 나와 갈림길에 선다. 옛 국도3호선을 따라 수회를 지나 살미 방면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석문동천을 따라 팔봉을 지나 난양이로 갈 것인지를 두고 잠시 망설인다. 두 길 모두 걸어야 할 곳이고, 또는 두 길 모두 노루목에 있는 살미 난양이(향산)에서 다시 만난다. 입춘이 지난 지금 꽃 피는 봄이 되면 걷기에 딱맞춤일 것 같은 팔봉을 향해 난 길로 길을 잡았다.
이 길은 원통 마을을 지나 도로고개를 넘으면 문강온천을 만난다. 다시 석문동천을 따라 흐르는 개울길로 걸으면 칼바위[劍巖]를 만나고 출렁다리를 만난다. 거기에 올라 달천 건너 팔봉 풍광을 보고 내려와 팔봉교를 건너 팔봉서원에 들렀다가 고샅밭길을 걸으며 싯계[細浦]로 부르는 달천을 따라 노루목에 이르는 노정이다. 노루목 난양이에서 자전거길로 안내하는 길이기도 하다.
두 곳에서 출발할 수 있다. 하나는 중앙경찰학교 앞에서 다리를 건너 신원 마을을 지나 도로고개에 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산림청 국립산림종자관리센터 앞에서 원통 마을을 지나 도로고개에 닿는 것이다. 두 길을 모두 걸어 보았지만, 선택의 문제이다. 봄이나 가을 풍광이 모두 좋은 곳이다. 봄과 가을에 각각 따로 걸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원통 마을을 지나는 길은 이번 대한(大寒) 아침에 걸었다. 종자관리센터 앞에서 출발해 똑바로 뻗은 길을 따라 논밭 사잇길로 걸었다. 1㎞ 남짓 곧게 뻗은 길 끝에 원통 마을이 있고 거기에서 다리를 건너면 바로 도로고개에 닿는다.
신원 마을을 지나는 길은 지난 9월에 걸었다. 유난히 비가 많았던 늦여름과 초가을이었고, 비 내린 뒤에 익어가는 벼가 군데군데 쓰러진 때였다.
두 마을 모두 입구에 마을비를 세웠는데, 신원 마을비가 이 지역 상황을 좀더 자세히 알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거기에는, ‘<신원마을 유래> 신원마을은 1913년 2월 말까지 연풍군 수회면 주막동에 속한 새터라고 부르던 마을이다. 1914년 전국행정 구역통폐합에 따라, 연풍군과 괴산군이 통폐합 되면서 괴산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수회면과 고사리면을 통합하여 상모면이 되고 행정 동명도 주막동이 수회리로 바뀌었다. 1937년 법정 리ㆍ동을 자연마을로 분구시켰으나, 새터 마을과 원통 마을은 합구상태로 두고 있었다. 합구된 양 마을의 호칭을 신대의 “신”자와 원통의 “원”자를 따서 “신원”이라 불렀다.’고 새겨 두었다.
두 마을은 석문동천을 중간에 두고 분명 나뉘어 있지만, <신원마을비>에는 합구된 상태로 한 마을처럼 표현되어 있다. 엄밀히 따지면 신원 마을은 주막동의 새터[新垈]이다. 마을 규모를 보더라도 새터가 훨씬 크고 주위의 논밭도 훨씬 넓다.
석문동천을 중간에 두고 두 마을을 지나는 길은 도로고개에서 다시 만난다. 도로고개에 서서 뒤돌아 보면 신원 마을과 원통 마을, 그리고 수회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적보산 아래에 자리잡은 수회 전경이 시원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날씨 변화에 따른 깔의 변화도 적보산의 크기만큼 다양하게 느낄 수 있다.
도로고개에는 전주유씨 전릉부원군종중에서 2014년에 세운 유래비가 있다.
<도로고개 유래비>
충주시 수안보면 수회리 산28-1
이곳은 수안보면 석문동천(石門洞川)과 중산천(中山川)이 만나서 수회리 신원(新院) 새터마을 앞을 돌아 서쪽의 살미면 문강리 아래에서 달천강으로 들어가는 발치봉 아래의 강진마을 주막거리 동쪽 언덕에 위치하는 고개이다. 이 고개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을 안고 있다.
조선 선조조(宣祖朝) 임진왜란 때에 춘호(春湖) 류영경(柳永慶) 「1550년생 1608년졸, 증 영의정 전릉부원군 류의(柳儀)의 차자(次子) 1572년 문과 1599년 대사헌 1602년 이조판서 우의정 1604년 호성 2등 공신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 좌의정 영의정」이 경상도에 일시 체류하게 되어 그곳에 행차(行次)하는 도중에 그의 형인 월봉(月篷) 류영길(柳永吉) 「1538년생 1601년졸 1559년 문과 장원 1589년 강원도 관찰사 1593년 한성부우윤 정유재란 때 행호군 연안부사 1599년 병조참판 1600년 예조참판」이 난국(亂局)에 벼슬을 사앙하고 은거하는 충주의 팔봉(八峯)마을에 하루를 머물 때의 일이다. 이때에 월봉공은 원래 검소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졌지만, 의복과 식사가 너무 초라해서 동생 춘호공은 이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경상도에 내려가서 체류하는 동안에 우선 식량과 필목(疋木) 등을 두어 바리 장만하여 인편에 실려서 그의 형님인 월봉공 댁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을 싣고 온 사람이 인사와 함께 취지를 월봉공에게 고하고 물건을 내리려고 하였다. 이에 월봉공은 그것을 말리면서 말하기를,
「이렇게 먼 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았소, 시장하고 피곤할 터인 즉 쉬어가라 함이 도리인 줄 아나, 그 물건들을 내 집으로 잠시라도 들여놓을 수가 없다.」고 말하고는 오히려 노잣돈을 주며, 가다가 요기나 하라고 도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짐을 싣고 왔던 사람들이 진퇴양난이었으나, 월봉공이 하도 강경하게 거절하는지라 하는 수 없이 문강의 동쪽의 산 고갯길을 다시 넘어 가면서, 「이 무거운 짐을 가지고 이 고갯길을 다시 도로 넘어가야 하다니」 하면서 동네 사람들을 보고 불평을 하였다 하여 이때부터 이 고개를 사람들은 도로 넘어간 고개라 하여 「도로고개」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그 후에 여러 사람들에게 이 사연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지면서 도로고개라 부르던 것이 점차 변하여 지금은 돌고개라고도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사라져가는 도로고개의 옛 이야기를 살펴서 「도로고개」의 사연을 전하고 월봉공과 춘호공 형제의 청빈(淸貧)함과 형제간의 우애(友愛)를 기리고자 후손들이 이를 돌에 새기어 세운다.
서기 2014년 9월 일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유병태(兪炳泰) 謹撰 全州柳氏 全陵府院君宗中 建立
<도로고개 유래비>에 등장하는 유영길ㆍ유영경 형제 이야기는 단월의 유주막 전설과 함께 팔봉 양편에 전해지는 대표적인 전설이다. 이 길의 시작과 끝에 두 전설을 펼쳐놓고 걸으며, 팔봉서원을 중간에 두고 생각하면 역사적인 이야기가 녹아 있는 길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도로고개 유래비를 살펴보고 뒤돌아 적보산 아래 자리한 수회 풍광을 두루 바라보며 땀을 들인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홈피에 게재돼 있는 모든 이미지를 무단도용, 사용이 발각되는 즉시 민형사상 책임을 받게 됩니다. ※ 외부 기고는 충주신문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기고문은 원작자의 취지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가급적 원문 그대로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관련기사목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