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수회에서 난양이(향산)까지 - 1 <갈마고개를 지나서>

김희찬 | 기사입력 2024/03/18 [10:25]

다시 수회에서 난양이(향산)까지 - 1 <갈마고개를 지나서>

김희찬 | 입력 : 2024/03/18 [10:25]

 

▲ 건너편 신대 마을에서 본 수회(적보산이 우뚝하다)  © 충주신문

 

‘다시 수회에서 난양이까지’라고 하여 앞서 걸었던 길을 다시 걷는 것은 아니다. 수회 시내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간 길을 따라 되돌아오는 길이다. 앞서 걸었던 길은 석문동천을 따라 칼바위에 이르고, 팔봉을 지나서 달천을 따라 걷는 길이었다면, 이 길은 갈마고개를 넘어 걷는 길이다. 수회에서 두 길이 갈라졌다가 다시 만나는 곳이 난양이이고, 노루목이다.

 

▲ 수회 시내버스 정류장과 마을비, 그리고 양조장 간판  © 충주신문

 

수회 버스정류장 바로 옆에 마을비가 있다. 지금은 수안보면이지만, 직전에 상모면이었고, 1995년까지 중원군 상모면, 1962년까지 괴산군 상모면 1896년까지 연풍현 지역이었다. 1872년에 그린 연풍현지도를 보면 수회시(水回市), 수사창(水社倉)이 표시되어 있다. 장이 섰던 곳이고, 연풍현의 군량미 창고가 있던 곳이다. 또한 역참제가 이어진 시기에는 수회참(水回站)이 있어서 파발마를 운용하던 곳이었다.

 

새재를 넘어와 이어지는 연풍현의 길목 마을이 역(驛), 원(院), 참(站)으로 이어지고, 충주와 갈마(葛馬) 고개를 경계로 하는 수회 역시 사람들이 많이 지나던 곳이었다. 그에 따라 수회에서 만나고 헤어졌던 이들이 남긴 시가 여러 편 있고,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기록도 보인다.

 

‘연풍은 충주 동남의 조령 아래에 연풍군[延豐郡, 경성에서 28리반(약 112㎞)]의 별명(別名)으로 상모(上芼)ㆍ장연(長延)을 말한다. 산 아래에 온천이 난다. 또한 안보역(安保驛) 남쪽 통로에는 참(站)이 하나 있다.

 

안보역에서 2리(약 8㎞) 정도 비탈길 아래에 수회장(水回場)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농가가 자그마한 언덕에 띄엄띄엄 있다. 이곳은 일청전역(日淸戰役, 1896년 청일전쟁)에서 아산(牙山)의 패병이 통과한 땅이다.

 

마을 사람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청병(淸兵)이 4일간 연속해서 이 마을을 통과해 강원도로 향했는데, 소ㆍ말ㆍ닭ㆍ돼지 등 가축들을 내놓으라며, 쇠붙이는 부엌칼까지 남김없이 탈취했고, 옷가지도 대부분 약탈당했다.”고 말했다.

 

내가 이 땅을 통과할 때에 담뱃대ㆍ천조각 등이 길가에 버려진 것을 보았다. (항옥성복(恒屋盛服), 『조선개화사』, 동아동문회, 1904. pp.80~81.)’

 

▲ 수회 마을비와 선정비  © 충주신문

 

1895년 7월 말의 수회에서 벌어진 한 장면이다. 이에 앞서 부산에 상륙한 수많은 일본군이 수회를 지나 걸어서 서울로 향했다. 1592년 6월 7일에 충주를 공략했던 소서행장(小西行長)의 부대 18,000명이 지난 후에 다시 벌어진 전쟁의 기운이 수회를 감돌며 지나간 흔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회 마을비 앞에서 그 광경을 잠시 상상해 본다.

 

▲ 현감 정희하 청덕선정비(무오년 건림)  © 충주신문

 

마을비 옆에 비석 하나가 섰다. 자세히 살펴보면 ‘縣監鄭侯羲河淸德善政碑’라고 새겨져 있다. 정희하(1681~1747)는 장암(丈巖) 정호(鄭澔, 1648~1736)의 아들이다. 정호는 우암 송시열의 제자이고, 수암 권상하와 함께 송시열 사후에 정계에서 노론(老論)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충주에 누암서원(樓巖書院)을 세우고 송시열을 위시한 충주 지역의 인물들을 배향하고 후학 양성의 기반을 닦은 사람이기도 하다. ‘판부사(判府事) 정호에게 식물(食物)을 내리고, 그 아들 정희하에게 가까운 고을을 주어 봉양하기에 편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는 영조실록의 기록처럼, 정희하는 음직(陰職)으로 진천ㆍ연풍 현감을 지냈다. 정희하가 음직으로 나가기 전에 충렬서원의 교관(敎官)으로 있었던 일이 있다.

 

충렬서원은 1727년 3월에 사액(賜額)되었는데, 사액을 추진한 중심 인물이 정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정호와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이었다. 정희하가 연풍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던 때에 정호가 사망(1736년)했고, 3년 상을 지내던 중인 1738년(무오)에 세운 선정비가 수회 마을비 옆에 있다.

 

대부분 한번 보고 지나가는 비석이지만, 비석의 주인공을 둘러싼 충주 이야기를 되짚어보면,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이후에 충주에 태실이 있는 경종(景宗, 재위 1720~1724)과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초기의 충주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 문설주에 박힌 상모양조장  © 충주신문

▲ 수안보 양조장  © 충주신문


흙먼지 날리며 달리던 파발마를 갈아타던 수회참이 있던 곳은 어디일까? 기본적으로 길가에 있었을 것이고, 마방과 관리인 등이 상주할 수 있는 너른 터가 있어야 한다. 마을비를 지나면 양조장 간판이 보인다. ‘월악산 온천명주 수안보 양조장’이라는 입간판이 길가에 있고, 오른쪽으로 양조장 건물이 있다. 양조장 입구의 문설주에는 ‘上芼釀造場’이라는 이전 상호가 박혀있다. 양조장을 중심으로 동네를 한바퀴 걸어보았다.

 

▲ 양조장 뒷길  © 충주신문

 

지금은 양조장이지만, 양조장이 있는 공간 전체가 수회참이 있었던 곳임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러나 아무런 표식이 없으므로 그곳이 파발마를 갈아타던 참이었음을 알 수 없다.

 

▲ 수회초등학교  © 충주신문

 

수회에는 학교가 두 곳이다. 하나는 1944년에 수안보국민학교 수회분교장으로 시작한 수회초등학교이고, 다른 하나는 1987년에 개교한 중앙경찰학교이다. 시골의 면 지역 초등학교가 급격한 저출산의 영향으로 폐교되거나 폐교 위기에 처한 것처럼 수회초등학교도 전교생이 24명(2024년 수회초등학교 홈페이지 기준)으로 위축되어 있다. 적보산을 뒤로 한 수회는 자그맣고 조용한 시골 마을이다. 그저 시골 마을일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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