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목에서 달천나루까지 - 4

김희찬 | 기사입력 2024/05/21 [15:25]

노루목에서 달천나루까지 - 4

김희찬 | 입력 : 2024/05/21 [15:25]

 

▲ 영곡사 산신각  © 충주신문

 

영곡사 앞에서 만난 정지상을 분행역까지 전송하고 돌아와 정심사 앞에 다시 선다. 고개 들어 골짜기를 보지만 계절도 계절이려니와 중간에 빽빽한 나무에 가려서 산신각은 잘 보이지 않는다. 봄이 무르익으면 산신각은 버드나무에 날개를 감춘 꾀꼬리처럼 꼭꼭 숨어버린다.

 

그래도 정심사 앞에 다시 선 이유는, 정지상이 지나간 후에 거기에 들러 올랐던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진화(陳澕)와 김극기(金克己)가 그들인데, 모두 고려시대 사람들이다.

 

已臨絶壑俯長松 이미 낭떠러지 구렁에 임하여 우뚝한 솔 굽어본 뒤

更踏層梯策瘦筇 다시 층진 사다리 밟으며 여윈 지팡이 짚네

還笑遊人心太躁 도리어 우습구나, 노는 사람의 마음이 매우 조급하여

一來欲上最高峯 한 번 와서는 가장 높은 봉에 오르려 하누나

- 진화, 「영곡사」, 『매호유고, 동문선, 신증동국여지승람』

 

진화의 생몰년은 자세치 않다. 고려 고종(재위 1213~1259) 때에 지었다는 경기체가 「한림별곡」 제1장에 ‘이정언(李正言) 진한림(陳翰林) 쌍운주필(雙韻走筆)’이 있는데, 이정언은 이규보(李奎報, 1169~1241)이고, 진한림은 진화를 가리킨다.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는 진화의 시에 화답하거나 교유한 상황이 여러 편 확인된다. 그리고 진화의 『매호유고(梅湖遺稿)』 부록에는 이규보와의 수창시(酬唱詩)로 13편을 따로 편제하여 수록하였다.

 

그 중에 ‘내가 훌륭한 작품을 많이 받았는데, 근체(近體)의 단장(短章)은 진실로 청경(淸警)하고 절묘(絶妙)하였다. 그러나 장편거운(長篇巨韻)에도 마음대로 붓을 달리는 호방한 기상이 있는지는 몰랐으므로 장편으로 시험해 보았는데, 이제 화답한 신편(新篇)을 받아 보니 사어(辭語)가 분방(奔放)하여 진실로 육합(六合 사방과 천지) 밖에 있었으니, 차탄만 할 뿐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며 <진군이 다시 화답하였으므로 차운하여 주다(陳君復和 次韻贈之)>(이규보, 『동국이상국집』 권11, 고율시)는 시의 서문에서 진화의 장편시에 대해 논평하며 칭찬하고 있다. 이규보는 진화의 형인 진식(陳湜)과 동년으로 친구의 동생인 진화를 ‘진군’으로 친근하게 호칭하였다.

 

진화의 영곡사는 오르는 과정과 올라서 생각한 자신의 모습을 칠언절구로 그려냈다. 지금의 정심사는 오르는 시작부터 지그재그로 길이 닦였다. 초입에는 작대기를 다듬은 지팡이를 놓은 통이 있다. 진화는 영곡사에 오르며 중간쯤에서 뒤돌아보며 우뚝한 솔을 굽어보았다. 그리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 다시 지팡이를 짚고 영곡사에 도착했다. 사다리가 놓였을 중간 바위는 지금은 계단식으로 다듬어 놓아서 계속 걸어 올라갈 수 있다. 심지어 무거운 짐은 작은 곤도라에 실어 올려보내기도 한다.

 

영곡사에 오른 진화는 피식 웃었다. 노는 사람(遊人)으로 표현한 것을 보면 어떠한 계기로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마음은 몹시도 초조하다. 그리고 한걸음에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오르려는 자신의 욕심에 웃고 말았다.

 

영곡사에 오른 그는 왜 웃었을까? 아마도 고려 무신정권 시기의 상황을 단적으로 반영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영달(榮達), 성공(成功)을 향해 치달리던 상황에서 새롭게 등장한 무신정권의 장벽에 부딪혀 좌절한 자신의 모습이, 한걸음에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오르려는 욕심을 부리는 것으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진화의 영곡사는 웃음으로 끝맺고 있다. 욕심, 과욕을 깨달은 그는 내려왔지만, 그의 시는 아직 거기에 머물며 욕심부리며 삶에 지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진화의 시 중에 <한림 김극기를 그리워하며(憶金翰林克己)>가 있다. 최자(崔滋, 1188~1260)는 『보한집(補閑集)』에서 이 시를 ‘보궐 진화가 한림 김극기를 그리워한 시’라고 하였다. 보궐(補闕)은 정육품, 한림(翰林)은 정사품으로 김극기의 벼슬이 높다. 김극기가 사망한 때를 1209년(기사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 불우조의 영곡사에는 정지상과 진화, 그리고 김극기의 시를 나란히 소개하였다.

 

古寺虛涼地絶塵 허량한 오래된 절은 땅에 먼지조차 없는데,

 

何年卜築忍辛勤 어느 해에 애써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무릅쓰고 집을 지었는고.

畫樓影落南湖水 그림 누각은 그림자가 남호(南湖) 물에 떨어지고,

殘磬聲埋北嶺雲 경쇠[磬] 소리 여운은 북령(北嶺) 구름에 묻힌다.

 

日暖蘆溪魚結隊 날이 따뜻하니 갈대 시내에는 고기가 떼를 짓고,

人歸柳渚鶴連群 사람이 돌아가니 버들 물가에는 학이 줄을 지었다.

向僧欲說區中事 중을 향하여 세상일을 말하려 하니,

端坐無言冷不聞 단정히 앉아 말없이 냉정히 듣지 않네.

- 김극기, 「영곡사」,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4, 충청도 충주목 불우조.

 

김극기가 진화보다 먼저 영곡사에 올랐을 것이다. 길에 서서 바라본 정지상이나, 절에 오르는 과정을 그린 진화와 달리, 김극기는 절에 올라서 본 풍광과 상황을 그리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 불우조 영곡사에 정지상 → 진화 → 김극기의 시를 순서로 잡은 것은 시에서 구현한 공간 위상의 편차가 아닐까도 싶다.

 

포장도 되지 않은 영곡사 경내는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곳이었다. 관리하고 있었다. 언제 지어졌는지, 그들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곡사라는 절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여태 오리무중이다.

 

김극기가 보았던 영곡사는 앞에 남호로 그린 달내가 흘렀고, 뒤에 경쇠소리 울려퍼지던 북령은 대림산 자락이다. 봄인지 가을인지 모르지만 얼음 풀린 물에는 물고기가 떼를 지어 헤엄했고, 그 가에는 학이 줄지어 섰었다. 저녁 무렵이었을까? 말을 걸려고 했더니, 가부좌를 틀고 못 들은 척하는 스님이 밉살스럽기도 하다.

 

고려시대 영곡사는 이렇게 끝맺고 있다. 숭유억불정책으로 찌들고 찌들었을 조선시대의 영곡사는 어땠을까?

 

조선시대 지방 사고에 포쇄하러 가는 해는 정해져 있었다. 자묘오유(子卯午酉)년인 식년(式年)마다 정기적으로 포쇄별감을 파견했다고 한다. 1521년부터 1526년까지 충주목사로 재임했던 눌재 박상(朴祥, 1474~1530)이 성주사고 포쇄별감으로 가던 윤풍형(尹豊亨)을 단월역에서 대접하면서 지은 시에 잠깐 영곡사의 당시 상황이 언급된다. 식년을 기준하면 1522년(임오년) 봄의 상황으로 이해된다.

 

그 시의 주에 ‘靈鵠寺有鐵爐十二 官吹鍊所’, 영곡사에는 철로[도가니] 12개가 있고, 그것은 관(충주)에서 쓰는 쇠를 벼르는 곳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영곡사는 일종의 고급 대장간으로 연명했다. 지금은 정심사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정지상이 그렸던 세 뿔이 솟은 산신각과 함께 천년 세월이다. 

 

▲ 영곡사 산신각에서 본 노루목  © 충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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