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인도의 경전을 이렇게 가깝게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만나면 만날수록 점점 스며들었다. 처음에는 ‘바가바드 기타’를 읽었고, 두 번째는 고대 인도의 통치술 ‘실리론’을 읽었고, 이번에 인문학 선생님께서 인도 경전 ‘우파니샤드’를 말씀하셨다. 한 번 읽고 인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지 않기에 책을 모두 구입하고 두고두고 살펴볼 예정이다. 인도의 경전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 몇 번을 반복해서 읽고 강의를 듣기로 했다.
우파니샤드 사상은 수천여 년 동안 인도 사람들 삶의 대부분을 지배해왔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놀라운 점은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뿐만 아니라 인도의 정통 철학으로 알려진 상키야, 요가, 니야야, 바이셰시까, 미망사, 베단따 등 이른바 육파철학도 우파니샤드의 바탕 위에서 성립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불교를 통하여 우파니샤드를 조금조금씩 불교인지 민간신앙인지 모르게 접해왔다. 현존하는 우파니샤드는 200개가 넘지만, 주요 우파니샤드로 꼽히는 18개의 우파니샤드는 대략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 사이에 성립되었는데, 우파니샤드라는 말은 제자가 스승 바로 아래 아주 가까이 앉아 전수받는 지혜라는 뜻이라고 한다.
인도의 베다는 4개가 있는데 리그 베다, 사마 베다, 야주르 베다, 아타르바 베다로 나뉜다. 리그 베다는 가장 오래된 베다로 신에 대한 찬가와 당시의 우주관, 철학관, 신관들을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최소한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20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마 베다는 리그 베다보다 후대에 쓰인 것으로 리그 베다의 신에 대한 찬가를 일정한 형식으로 묶고 그 찬양의 해석과 상징적인 의미 등을 상세히 기록한 것이다. 아쥬르 베다는 주로 제례 의식의 다양한 형식적 관례를 다룬 것이며, 아타르바 베다는 실제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건강, 장수 질병 치료, 죽음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들은 모두 베다 혹은 상히따(samhita)라고 통칭되고, 그 뒤를 이어 제례의 내용을 풀이한 브라흐마나(Brahmana), 상징성에 대한 해석과 철학적 성격이 강한 아란야까(Aranyaka), 신비적 사상의 결정체인 우파니샤드(Upanisad)가 나온다. 여기까지 읽은 지식으로도 이미 머리에 과부하가 와서 어렵다고 느꼈는데, 인문학 선생님이 조목조목 낮은 음성으로 들려주어 접근을 가능하게 해주셨다. 다음 학기에 좀 더 깊이 있게 들어간다니 너무 기대되어 가슴이 두근거린다. 얼마 만에 지식을 갈구하는 목마름인가. 내가 나이가 들면서 부족하다고 느낀 부분이 이런 부분이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자신의 참모습인 아뜨만, 널리 퍼져 있는 것이라는 뜻의 브라흐만을 통해 진짜 자기 자신을 알고, 삶과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방법과 내용을 이야기를 통해 전달된다. 인간은 그가 행하는 대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우리가 불교용어로 흔히 들었던 업이며, 이렇게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되어 돌고 도는 것이 윤회이며, 윤회를 그치고자 한다면 욕망을 없애는 것이라고 한다. 즉 현세에서 전생에 내가 만든 업을 모두 소멸시킨 후에라야 윤회의 고리에서 빠져나와 안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살면서 본인도 모르게 많은 업을 쌓는데 언제 그 업을 다 소멸시킬 수 있겠는가 궁금하던 나는 선생님의 말씀으로 이해를 했다. 업을 없애는 방법은 선행도 맞지만, 명상과 요가를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해탈을 하면 드디어 윤회를 그치고 브라흐만의 세계에 드는 것을 말하고, 이는 아트만과 브라흐만이 결국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너무 심오한 사상이라서 두 학기 수업을 듣는 것으로는 아직 많이 목마르다.
내게 가장 쉽게 다가온 내용은 소금물에 비유한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몇년간 공부를 했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소금을 한 손에 쥐고 아들에게 주며 말했다. "이 소금을 물에 담그고, 내일 아침에 와 보아라." 아들은 그대로 했다. 아침이 되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다. "네가 어젯밤에 담가 두었던 그 소금을 꺼내거라." 아들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소금을 찾을 수 없었다. "총명한 아들아, 소금은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금은 그대로 그 안에 있다. 이제 맨 위 표면에 있는 물의 맛을 보거라. 맛이 어떠냐?" "짭니다." "그럼 물속 중간쯤에 있는 물을 맛보아라." "짭니다." 자, 그럼 이제 맨 밑바닥에 있는 물의 맛을 보아라." "짭니다." "그래, 그 물을 버리고 다시 내게 오너라." 아버지 말씀에 따라 물을 버리면서 아들은 생각했다. '소금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계속 그 안에 있었구나' "네가 그 존재를 볼 수는 없지만 그 존재는 여기 있는 것이다."
인문학 선생님께서 수업 시작과 마지막에 평온을 위한 낭독을 함께 하셨다. 현대를 살며 매번 시끄러운 소음과 말도 안되는 뉴스를 들어야 하는 우리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며 마음을 안정시키는 낭독이었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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