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쓴 제목 ‘상처적 체질’은 필자가 좋아하는 충주 태생의 류 근 시인의 시집 제목이기도 하다. 요즘처럼 인문학이 인기 없는 시대임에도 십 년 동안 19쇄까지 발행되고 있음을 보면 시인이 전하는 내용에 공감하는 마음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상처’는 국어사전에 몸을 다쳐서 부상을 입은 자리나, 피해를 입은 흔적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다쳐서 난 상처가 아닌 정신적, 즉 마음에 입은 상처를 말하기도 한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상처적 체질은, 필자를 포함한 상처를 잘 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상처받고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시인 류 근은 시에서,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다치고,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치고, 세월에 다치고, 이름 없이도 다친다고 했다. 그러니 상처도 상처 나름이겠지만, 류 시인은 매일 상처를 받는 분임이 틀림없다. 나 또한 지는 노을에도 상처를 받는 사람이다 보니 저녁 무렵이 되면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요즘, 뉴스에 나오는 내용들을 보면 범국민적으로 상처받는 일들이 많은 듯하다. 대형 사고로 목숨을 잃는 일부터 그에 따른 책임 공방이나 회피 또는 가짜 뉴스에도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고통을 당하는 유가족이나 피해자를 보며 남의 일 같지 않아 함께 눈물을 짓기도 한다. 그럼 우리는 이 많은 상처의 날들을 어떻게 견디고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도 이제는 심리치료를 통해 상처로부터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상처 뒤에 숨어 자신을 죽이는 하루가 아닌 상처 밖으로 나와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치유 받기를 원한다. 이것은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예전처럼 조개 속의 진주를 표현하듯, 상처받고 혼자 오랜 시간 견디다가 얻어지는 상처의 결과물인 진주가 되기보다, 힘들어하지 말고 지금의 자신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물론 상처를 아물게 한 노력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진주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다.
미국의 여류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1830~1886)의 시를 보자. <내가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헛되이 사는 것이 아니리. 내가 만약 한 생명의 고통을 덜어 주고 기진맥진해서 떨어지는 울새 한 마리를 다시 둥지에 올려 놓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사람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갈 때 더욱 존재의 의미가 빛난다. 유명한 철학자 니체도 ‘함께 침묵하는 것도 멋진 일이지만 그보다 더 멋진 일은 함께 웃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곧 사람은 관계 속에 함께 했을 때 사람 사는 맛이 난다는 아주 평범한 논리로 해석해도 될 것 같다.
상처적 체질, 상처를 잘 받는 체질이라 아프지만 좋다. 타인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될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까지 든다. 디킨슨의 배려 깊은 시를 읽노라면 얼마나 마음이 의연해지는지 모르겠다. 상처 많은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상처받은 이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회가 되어보면 좋겠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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