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는 인생이 한참이나 남은 것처럼 일리나를 대했어. 사랑은 그런 식으로 느긋하게 하는 게 아니야” 이 말은 프랑스 작가 기욤 뮈소의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소설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사랑만큼 복잡하고 미묘한 게 있을까? 그러면서도 한시도 사랑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에 대해 사뭇 사유하게 된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남긴 계명이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였고, 더불어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다. 석가모니는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하여 사랑은 갈등을 멈추게 하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강력한 힘이고, 전쟁마저도 이길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사랑의 정의는 무엇일까? 사랑이란 감정은 인간 정신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는 대표적인 감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우리는 왜 아직 완벽한 사랑을 이루는 것을 꿈처럼 여기는 걸까? 그리고 사랑을 느낄 때 분비된다는 호르몬만 해도 도파민, 페로몬, 세로토닌, 옥시토신, 바소프레시, 페닐에틸아민 등등 분비되는 여러 화학 물질들의 역할을 봐도 신기하다. 더구나 생화학적으로 뇌에서 분비하는 페닐에틸아민은 유통기한이 있는 호르몬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래서 사랑은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2년에서 3년이라는 유통기한이 있다고 하는 가 보다. 권태기 같은 이쯤에서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으로 인해 서로에게 편안한 상태의 이를테면 사랑의 ‘사회학 단계’로 넘어간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평생 같은 농도의 호르몬이 분비되면 서로에게 잠깐씩 권태기가 왔다가도 다시 사랑으로 빠져든다고 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엔 천생연분인 분들에게나 해당되는 경우 같다.
우리가 잘 아는 철학자 플라톤은 사랑을 4종류로 구분해서 정의했는데, 육체적 사랑과 도덕적 사랑 그리고 정신적 사랑과 무조건적 사랑으로 나누면서 육체적 사랑에서 무조건 사랑으로 서서히 발전해 간다고 했다. 스턴버그는 사랑은 친밀감, 열정, 헌신이라는 사랑의 삼각형 이론을 주장했는데, 이것이 완벽한 사랑에 가깝다고 한다. 그런데 닐 도널드 월쉬의 소설 ‘신과 나눈 이야기’에는 완벽한 사랑을 체험하려면 인간의 모든 감정을 다 맛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인간 영원의 목표는 그 모든 것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 참 어렵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이 사랑에 관하여 이야기를 할 때면 눈에 빛이 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렇다고 나이 든 기성세대라고 하여 별반 다르지 않다. 오랜 시간 함께 한 부부가, 서로 아껴주고 챙기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철학자들이나 이론가들이 사랑을 정의하지만, 실상 사랑은 각자의 감정 안에서 자연적으로 시작되고 끝이 나기도 한다.
다시 기욤 뮈소의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로 돌아가 보자. 사고로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인생을, 사랑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우리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지른 실수를 회복할 수 있을까? 기욤 뮈소는 인간은 운명적인 존재라는 의미를 소설을 통해 부여한다. 과거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우리 인생은 쉽게 바꿀 수 없고 변화시켜도 마무리가 바뀌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바꿀 수 없다고 해도 개선 시킬 여지는 있을 것이다. 지금, 나의 사랑은 어떤 모습의 사랑인지 보자. 사랑의 종류가 다양하고 사랑의 기술을 알아야 한다고 해도, 철없는 사랑이든 원숙한 사랑이든 사랑으로 인해 삶이 빛나고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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