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천나루에서 갈마까지 - 2

김희찬 | 기사입력 2024/08/15 [17:11]

달천나루에서 갈마까지 - 2

김희찬 | 입력 : 2024/08/15 [17:11]

 

▲ 달천역 뒤편  © 충주신문

 

▲ 달천역을 지나는 화물열차  © 충주신문

 

▲ 달천역 앞 유리거울 모양의 안내도  © 충주신문

 

▲ 달천역  © 충주신문

 

▲ 달천문화예술무대와 달천역  © 충주신문

 

앞선 걸음에서 단월을 지나며 잠시 헷갈리는 상황이 있었다. 옛 단월역 마방 자리를 차지한 행정복지센터 앞에는 ‘달천동’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그 이유을 들은 바 있지만, 그래도 영 납득이 안가는 부분이다.

 

달천나루를 건너면 용관동과 용두동 지역이다. 달천나루를 이용하던 조선시대에는 그곳에 용두원(龍頭院, 주 서쪽 15리)이라는 원집이 있었다. 기록 상황으로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달천다리를 건너며 앞을 가로지르는 것이 충주외곽순환도로이다. 외곽순환도로와 국도3호선의 연결을 위한 인터체인지가 들어선 곳이 용관동과 용두동의 경계 지점이다.

 

인터체인지를 지나면 작은 사거리가 나온다. 그 앞으로 육교가 하나 있다. 육교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달천초등학교가 있고, 왼쪽에는 달천역이 있다. 달천이라는 이름을 여기서도 볼 수 있는데, 학교와 역이 위치한 곳을 엄밀하게 따지면 좀 복잡하다. 그리고 어떤 곳도 달천동과는 무관하다.

 

갈마로 통하는 길을 살짝 벗어나 육교를 건너 달천역에 잠깐 들렀다. 달천역은 ‘무배차간이역’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곳은 1951년에 준공되었다고 하며, 또한 1978년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985년부터 특정 비둘기호 열차가 정차하던 곳이라고 한다. 비둘기호를 찾아볼 수 없는 지금은 여객 수송을 위한 기능은 사라졌다.

 

달천역을 찾은 이유는 몇 년 전에 읽었던 유종호(1935~ ) 선생의 『그 겨울 그리고 가을, 나의 1951년』(㈜현대문학, 2009)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나의 해방 전후(1940~1949)』(민음사, 2004)를 시작으로 『그 겨울 그리고 가을』, 『회상기, 나의 1950년』(㈜현대문학, 2016)으로 이어진 선생의 에세이는 일제강점기 말과 해방공간, 그리고 6.25 상황에서의 충주를 들려주는 이야기로 읽혔다.

 

‘나의 1951년’에는 선생이 청주에 피난해 있을 때, 3월 초쯤에 청주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부대에서 노무자를 쓴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고 한다.

 

“헬로, 아이 원트 투 워크 Hello, I want to work.”로 시작된 인연은 한 달 쯤 지난 4월에 부대를 옮기며 달천역에 도착한 첫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시계가 없으니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지만 별 탈 없이 어쨌건 목적지에 당도했다. 거의 어두워가고 있었고 이슬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목적지에 당도해보고 정말 놀랐다. 달천 역전은 내게 생소한 곳이 아니었고 본시 밀밭 아니면 보리밭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밀밭과 보리밭을 전혀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어려서 파랄 때도 보리가 밀보다 훨씬 색상이 진하고 씩씩해 보인다.) 그런데 역사 바로 앞은 큰 공지가 돼 있었고 그 뒤로 미군들의 천막막사가 촘촘히 서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천역의 위치는 똑같다. 충주로 가는 국도에서 한 200미터쯤 뒷동산 쪽으로 역사가 들어앉아 있다. 전날 출발했다는 선발대가 그사이 미군 천막막사를 다 세워놓은 것이다.”(유종호, 『그 겨울 그리고 가을, 나의 1951년』, ㈜현대문학, p.122.)

 

어쩌면 이것이 1951년에 준공되었다는 달천역을 그려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전에는 밀밭 아니면 보리밭이었던 곳이 역으로 바뀌었고, 역을 중심으로 미군 부대가 주둔하던 상황이다. 6.25 전쟁 중에 달천철교가 공습으로 파괴되어서 충주역까지 기차가 닿지 않던 때이다. 원주를 거점으로 주둔해 있던 미군의 후방 기지로써 충주가 고려된 때에 철도를 통한 보급품 수송의 임시 지점으로 달천역이 이용되던 때의 모습이기도 하다. 달천역에 주둔했던 미군 부대가 달천철교가 복구된 후 원주로 이동하며 유종호 선생도 따라갔다. 그 무렵 목행동에는 미공군의 쌕쌕이가 뜨고 내리던 임시 비행장이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지난해 11월에 금곡에서 용두동까지 걸으며 달천역의 뒤편으로 걸었다. 전기기관차가 달리는 충북선 달천역에는 몇 개의 녹슨 선로가 있었고, 열차 침목을 몇 무더기 쌓아놓은 것을 보았다. 열차는 서지 않고, 가끔 지나는 화물 열차도 서지 않는 역이었다.

 

요사이 다시 찾았던 달천역은 들어가는 입구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육교를 기준으로 왼편으로 달천역을 향해 있는 길은 곧다. 곧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달천역사 이마에 색깔 섞은 ‘달천역’이 붙어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문을 연 역처럼 보인다. 하지만 2010년에 무배차간이역으로 떨어지고, 여객취급마저 중단되었다.

 

여객취급이 중단된 직후, 2011년에 문화디자인 프로젝트 간이역으로 달천역이 선정된 일이 있다. 그것을 계기로 달천역 간판을 새로 걸었지만, 얼마 못가서 시들해졌다. 자그마한 역마당에는 그 흔적을 그린 안내도가 유리거울 모양으로 세워져 있다. 그리고 역 입구 오른쪽에 ‘달천문화예술무대’라는 이름을 붙인 작은 무대가 있다. 굳게 잠긴 현관 유리창에 다가서서 안을 들여다보니 텅 비었다. 어둑한 역 안에는 도자기가 전시되었었고 작업실과 카페파고라 등 작가와 찾는 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꾸며졌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의 발길이 뚝 끊겼다. 부근에 있는 한국교통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 시즌에 걸렸던 현수막 문구가 스친다. 입후보자가 내건 공약 현수막으로 기억되는데, 달천역에 열차가 정차할 수 있도록 한국철도공사와 협의하여 학생들의 통학 편의를 돕겠다는 내용이었다.

 

용두동과 용관동, 그리고 대소원면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달천역 부근만큼 한때 붐볐던 그곳은 찻길만 복잡하다. 격세지감이지만 충주를 통과하는 중부내륙철도의 선로를 가만히 보면 옛날의 역로를 따라 놓여졌다. 하지만 옛길과 새로 닦는 찻길이나 철길의 그것은 다르다. 걷던 시절의 옛길은 부분적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자동차가 기본인 지금에는 그야말로 잊혀가는 옛길이 되었다. 달천역이 반짝 흥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언제 다시 붐비는 역이 될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달천역 앞으로 곧게 뻗은 길을 따라 되돌아서며 용두사거리 복잡한 신호등 앞에 서서 갈마로 향해 곧게 뻗은 길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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