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란 시가 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슬픔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국어사전에 슬픔은, 슬픈 마음이나 느낌, 정신적 고통이 지속되는 일이라고 했고, 라틴어 ‘tristitias’ 에는 슬픔, 비통, 걱정, 근심, 비관의 뜻이 담겨 있다. 연일 35도가 넘는 폭염의 여름날을 보내고 있는 우리는 이젠 덥다는 말보다 계절의 변화가 두렵다며 앞날에 닥칠 이상기후에 불안하다는 말들을 한다. 이렇게 숨이 턱턱 막히는 날에 밭에 나가 일하시던 분이 유명을 달리하고, 장맛비에 논에 물고를 살피러 나간 분이 실종된 끝에 시신으로 돌아온 너무나 안타까운 슬픈 소식들을 접하며 무더위의 긴 여름을 우울하게 보내고 있다.
슬픔을 느끼는 일들은 더 있다. 임대료가 저렴한, 창문도 없는 원룸에서 지낸다는 어느 대학생의 인터뷰가 슬프고, 쪽방에서 에어컨도 없이 방문을 쭉 열어 논 채 지내시는 어르신들의 모습도 그렇고, 방학 아르바이트로 목에 두른 수건이 흠뻑 젖은 배달 학생의 모습이 슬프다. 그뿐이겠는가 현장에서 한낮의 열기를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고 있는 중년 아저씨의 모습이 연일 날아드는 폭염 주의를 알리는 안전 안내 문자가 무색하리만큼 슬프다.
기쁨이나 슬픔은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럽고 기본적인 감정이다. 우리는 내게 일어나지 않거나 겪어보지 않은 일들에 얼마나 공감을 할 수 있을까?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면 같이 슬퍼해야 하는데,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인간적이지 못하다고 말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영국의 J. 레이가 말한 ‘기쁨은 나누면 배가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준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을까?
슬픔 없이 항상 행복하다면 어쩌면 우리는 안주하는 삶을 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단 안주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슬픔을 통해서 우리는 성숙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누군가를 위로하고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슬픔에 대해 위로를 건네는 것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다. ‘슬픔의 위로’의 저자인 메건 더바인은 서툰 위로를 건네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고 했다. 아마도 슬플 때 위로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기에 우리는 슬픔을 마음껏 슬퍼하지 못하게 참도록 한다는 것이다. 물론 죽음과의 이별에 대한 슬픔을 이야기한 것이지만, 슬픔도 마음껏 슬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찌 됐든 정호승 시인의 시를 통해 슬픔의 힘이 무엇을 말하는지, 또 슬픔의 위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요즘 뭔지 우울한 우리 사회 분위기 속에 잠시 슬픔에 대해 생각해보며 나의 삶이 이기적인 삶은 아닌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어떤 건지 잠시 반성하며 생각해본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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