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사거리에서 북쪽으로 곧게 뻗은 길이 있다. 요즘같은 날씨에는 걸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 가흥창까지 세곡을 운반하던 이들에게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던 곳일 것이다. 편평하게 곧은 길이 주는 시원함과 가흥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에서 다시 힘을 내지 않았을까 싶다.
봄에 / 가만보니 / 꽃대가 흔들린다 // 흙 밑으로부터 /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 중심의 힘 // 꽃피어 / 퍼지려 / 사방으로 흩어지려 // 괴롭다 / 흔들린다 // 나도 흔들린다 // 내일 // 시골 가 / 가 / 비우리라 피우리라 <중심의 괴로움 – 김지하(1941~2022)>
뜬금없이 <중심의 괴로움>을 읊조린 이유가 있다. 거기에서 가흥까지 가는 길에 중앙탑(中央塔)을 지난다. 중앙탑은 통일신라 시대에 국토의 중앙을 확인하려고 남과 북에서 동일한 걸음걸이인 건장한 두 사람을 동시에 출발시켜 만난 곳에 세운 탑이라는 전설이 있다. 그것이 그 시대의 중심이었다면, 하검단으로 향하는 곧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작은 비석에는 또다른 중심이 있다.
곧은 길의 중간에 닿기 직전에 전봇대 앞에 서있는 작은 비석이 있다. 비석 앞면에 ‘여기는 世界中央地’라는 낯선 글귀가 있다. 그 낯섦에 이끌려 비석의 사방을 돌아가며 한참을 살펴보았다. 구득도(求得道) 정령회(正靈會)의 울산 본부에서 세웠다고 새겨 놓았다. 영기(靈起) 24년 정월 22일에 세웠다고 하는데 ‘영기’가 무엇인지 모르니 몇 년도를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비석을 세운 이유를 ‘대자연령섭리령성선생강지지(大自然靈攝理靈聲先生降之地)’라고 하였는데 구득도라는 단체에 대해서도 잘 모르니, 그냥 그들이 위하는 신[정령]이 내려온 곳이라는 정도로 이해했다.
이처럼 충주에는 전설로 내려오는 중앙이 있고, 어느 종파에서 이야기하는 중심지가 탑으로 비석으로 세워져 있다.
낯모르는 세계중앙지를 지나 하검단 마을을 향해 걸으며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는 어릴 때 친구들과 달천나루까지 와서 여름이면 수박서리를 하셨다고 했다. 강건너 용두동 강가에 수박밭이 있어서 어둠이 내리면 친구들과 달천을 헤엄쳐 건넜고, 용케 다시 건너와 서리해 온 수박을 친구들과 나눠먹었다고 한다. 또한 거기는 한때 사금 채취를 하던 곳이라는 이야기를 보태기도 하셨었다.
2005년에 방송 관련 일을 할 때에 용두동을 찾아 촬영한 일이 있다. 거기에는 화훼단지처럼 여러 농가가 비닐하우스에서 연중 꽃을 재배하였고, 수확한 꽃은 양재화훼시장으로 출하한다고 하였었다. 또한 화훼로 전환하기 전에는 충주에서도 이른 시기에 방울토마토를 키웠던 원조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충주 여러 곳에서 시설하우스 재배가 성행하고 있지만, 용두동은 그 시작쯤 되는 마을이었음을 떠올리며 곧은 길 끝에 이르렀다.
왼쪽으로 굽은 길을 돌아서면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하검단 마을이다. 마을 중간에 한국교통대학교 후문으로 통하는 길이 있고, 오른쪽 산자락에는 충청고속도로 공사를 하며 산허리가 싹둑싹둑 잘려나가 허연 속살을 드러냈다. 마을 가까이 다가서면 다리가 하나 놓여 있다. 요도천(堯渡川) 또는 팔십천(八十川)으로 불리는 냇물을 건너는 다리이다. 예전에도 거기에는 다리가 놓였을 것이다.
다리를 건너면 ‘검단삼거리’로 불리는 갈림길이 나온다. 삼거리 오른쪽 마을이 ‘하검단’이다. 자료를 살피다가 그 마을에서 있었던 참사를 다룬 기사가 있었음을 떠올렸다. <충북신보> 1959년 7월 12일자 기사였다.
1959년 7월 7일 한밤중에 집중호우와 홍수로 인해 하검단 마을에 산사태가 나서 3가족 9명이 압사한 큰 사건이었다. 사고가 있었지만 물이 불어난 관계로 현장에 지원 손길이 도착한 것은 9일 아침이었다고 한다.
‘…(전략)… 이 급작스러운 참상에 동리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나 비가 쏟아지고 캄캄한 지옥 속에서 구제작업이란 엄두도 못낼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날이 밝아 8일에는 사방이 무변대해와 같은 물난리에 연락은 두절되었으나 동리 사람이 우선 시체 발굴에 착수하였다는 것이며 인근 동인 상검단리(上檢丹里)와 창동(倉洞) 부락 사람의 응원과 이류지서 직원 및 이류소방대원이 달려와서 8일 오전 중에 시체 3구를 발굴하고 오후에 2구, 밤중에 1구, 그리고 9일 오후에 2구를 다시 발굴하였던 것이다.
충주시에서 동 부락에 배를 타고 겨우 들어간 것은 9일 아침 근 100명의 청장년들이 이류지서 주임 임영식(林泳植) 씨 지휘로 2부제로 나누어 시체를 발굴하고 있었다. …(후량)…’)충북신보, 1959년 7월 12일자 기사 부분)
65년 전의 사고 보도 기사이다. 불어난 달천의 수압으로 쏟쳐내리는 요도천의 흐름이 막혀 고립된 하검단의 모습, 그래서 접근이 어려웠던 상황이 그려진다. 1914년에 측도된 지적원도로 하검단리를 재현해 보니 규모가 있는 마을이었다. 교통대학교가 자리하면서 학생들의 원룸촌으로 변하고 있지만, 마을 뒷산에 완전 개통을 위한 충청고속도로의 막바지 공사가 한창인 상황이 내겐 위태로워 보였다.
작년 11월 13일에 걸으며 보았던 하검단 마을은 다음 주에 대학이 개학하면 다시 활기를 띨 것이다. 그리고 요도천 끝자락에 헤엄치던 오리들도 두세 달 지나면 다시 돌아와 무리지어 헤엄칠 것이다. 다만, 이번 여름 무더위에 대한 기억은 경험한 이들의 기억 속에 있겠지만, 1959년 수해 피해와 그 이전에 그 마을 앞을 지나던 세곡 운반의 달구지 행렬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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