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탑을 중심으로 공원이 자리하고 있어서 주말이면 그곳을 찾는 내외지인들이 많다. 또한 시립충주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어서 충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이해하기에 편리한 곳이다. 30년 된 건물이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신축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기도 하다.
공원 구역을 지나면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언제부턴가 점심시간이면 찾는 이가 많아서 주차할 곳이 없을 정도로 메밀막국수집이 유명한 곳이 되었다. 보조댐이 만들어지고 잔잔한 호소공간이 된 물길은 2013년에 세계조정선수권대회를 개최했을 정도로 전국에서 조정 경기를 하기에 가장 좋은 곳 중의 하나이다. 국제경기를 치르면서 관련 건물이 세워졌지만, 이후의 활용에 있어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것 같다. 최근에 전기 유람선을 한 척 띄웠는데, 수익 문제로 운영사측과 충주시 사이에 잡음이 있기도 하다.
오른쪽으로 탄금호를 두고 걸어가다 보면 면사무소가 있는 소재지가 나온다. 다른 면의 소재지에 비해 규모가 작다. 어쩌면 너른 호수와 함께 주변이 너른 들로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4년에 <지방행정구역개편>이 되면서 가흥면과 금천면을 합쳐서 가금면이 되었고, 초기에는 가흥면의 중심이었던 가흥에 면사무소를 두었었다. 그러던 것이 1943년에 면사무소를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면사무소를 지나면 작은 다리 하나를 만난다. 왼편으로 낚시터처럼 보이는 곳이 있는데, 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흐르늪’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흐르늪이 남한강과 만나는 곳 아래는 ‘안반내’라는 마을이 있다. 10여년 전까지 양조장이 있던 곳이다. 최근에는 여러 개의 카페와 전원주택이 들어오면서 마을에 변화가 일고 있다.
마을 이름은 예전부터 ‘안반내’로 불린 곳이다. 그러나 이름을 놓고 지난 100년간 덧보태진 의미 해석을 보면 외형적인 변화보다 큰 혼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 이름의 한자 표기는 여러 가지로 확인된다. 1914년의 <지방구역명칭조정>을 위한 기초 조사에서는 ‘盤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1910년의 1대 5만지형도에는 ‘半內’로, 1915년의 지형도에는 ‘內盤川里’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1987년에 충청북도에서 펴낸 『지명지』에는 ‘半川’ 또는 ‘韓半來’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부르기는 모두 ‘안반내’라고 한다.
지명은 쉽게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어떻게 불렀을까? 용례가 많지 않지만, 그곳에 들렀던 사람들의 기록에서 두 개의 예를 찾을 수 있다.
이이순(李頤淳, 1754~1832)의 문집인 『후계집(後溪集)』에 수록된 시 중에 ‘여강주중(驪江舟中)’에 단 주를 보면, ‘元陵五十年甲午秋八月 稱慶設庭試 與舍伯並轡赴試 踰竹嶺 出中原 至安盤川 買舟水行.’이라는 설명이 있다. ‘영조 50년 갑오(1774)년 가을 8월에 칭경 정시(稱慶庭試)가 있어서 형과 함께 정시를 보려고 죽령을 넘어 중원에 나아가 안반천에 이르러 배를 사서 물길로 갔다.’고 하였다. 이 내용은 그의 문집을 해제(解題)하며 행력(行歷)으로 정리하였는데, 영조 50년인 1774년 갑오인 건릉 39년에 21세로, ‘8월, 칭경정시(稱慶庭試)를 보기 위해 형 이종순(李鍾淳), 권호(權浩) 등 7인과 죽령을 넘어 안반내(安盤川)에 이르러 배를 사서 타고 가며 신륵사(神勒寺), 두모포(豆毛浦), 독서당(讀書堂)을 거쳐 도성으로 들어가다. 여강을 유람하던 중에 시를 짓다.’라고 하였다. 칭경 정시는 1774년 8월 20일에 경복궁에서 설시한 문과정시(文科庭試)인데, 이때 무과회시(武科會試)도 같이 설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792년에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1만 57명)를 작성한 이우(李瑀, 1739~1811)의 문집인 『면암집(俛庵集)』 별집에 수록된 임자일기(壬子日記)를 보면(임자년은 1792년임), 윤 4월 13일에 삼계서원(三溪書院, 경북 봉화)에서 돌린 통문에 의해 만인소에 동참한 유생들의 명단을 취합해 만인소를 완성하고, 17일에 서울을 향해 떠났다. 18일에 풍기향교에서 만인소를 올릴 유생 13인과 만났고, 19일에 출발해 죽령을 넘어 장회(長會, 단양)에서 자고, 20일 오시(午時)에 충원에 도착해 충주 인사들과 여러 의논을 나눈 후, 안반내(安盤川)에서 잤다고 한다. 그리고 23일에 입성(入城)하는 것으로 일기가 이어지는데, 만인소를 올리기 위한 상경길에 안반내에서 하룻밤 잤던 것이 확인된다.
두 사람의 기록에 ‘安盤川’으로 적었지만, 그것은 ‘안반내’의 한자 표기이다. 이들이 서울로 가는 길에 안반내에서 잤던 이유는 주막과 나루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910년대의 조사(『조선지지자료』(필사본), 1911)에서 가금면 지역에 있었던 주막으로, 안반내ㆍ가흥ㆍ탑들 등 세 곳이, 주요 나루로 안반내와 창동 나루가 있었다.
지금은 많은 부분이 수몰되었지만, 1914년에 측도한 지적원도를 보면 흐르늪과 남한강이 만나는 부분을 중심으로 안반내나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길과 땅길이 남한강을 따라 나란히 이어졌던 상황에서 달여울을 지나며 동남쪽으로 물길이 바뀌며 안반내에서 닿는다. 안반내를 지나며 물길은 다시 북쪽으로 꺾인다. 물길의 흐름이 바뀌는 지점에 위치한 안반내는 든든한 지반 위에 자리한 마을이었다.
지적원도로 보면 탑평리 중에서도 안반내 마을의 규모가 가장 크다. 특히 안반내를 지나서 북쪽길은 장미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조선시대 역로는 형천에서 하담나루를 건너 북진나루로 이어지는 노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안반내를 거쳐서 서울로 가는 경우 배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수 있다.
안반내 마을 시내버스 정류장 뒷골짜기에는 안반내 산제당이 있었다. 달여울을 지나며 안반내로 내려오는 배나 뗏목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안반내 마을로 들어가며 10m쯤에 홍수흔적기념비가 있는데, 1972년에 물이 찼던 지점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당시에 가금면사무소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며 8년을 근무했던 김동희 선생님은 면사무소쪽으로 물이 차오를 때 커텐을 뜯어서 호적대장을 싸가지고 피난했던 일과 홍수에 떠내려간 면사무소 문서함을 건져올린 김포군에서 연락이 왔었다는 기억을 들려준다. 그 후에 그때만큼 홍수 피해를 입은 일은 없지만 장미산 둘레로 신작로가 개설되며 길 아래 마을이 되었고, 물길을 이용하던 수운이 폐지된 후에는 한가한 시골 마을로 전락하고 말았다.
강 건너에는 옥강정(玉江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100년 전에 이미 사라졌다. 그러나 배를 타고 내려가던 이들이나 옥강정 근처에 사는 지인을 생각하며 남긴 시에는 종종 등장하는 소재이다.
<충주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학사 홍계회와 이별하며[別洪學士季會 㱕忠州舊居]>
此朋非面朋 이 친구야 얼굴 볼 수 없는 친구야 此別眞傷別 이 별리가 참으로 슬픈 별리일세 君歸玉江亭 그대 돌아가는 옥강정엔 秋水孤懸月 가을 맑은 물에 외로운 달 걸려있으리 - 권이진(1668~1734), 『유회당집』, 시.
옥강정은 사라졌고 강 풍경도 변했다. 낮 시간의 가을 풍경이 끝나고 찾아오는 밤 풍경도 일품이다. 가을 밤 맑은 강물에 하늘이 잠긴 안반내 앞 잔잔한 물결을 찾아보시라.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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